[특집]

아나모르포즈와 시선의 전복

 


심상용 / 미술사학박사·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 교수

 

 

아마모르포즈(anamorphose), 또는 아나모르포시스(anamorphosis), 그 사전적 의미는 일그러져 보이는 이미지, 또는 왜곡된 상(像)이다. 아나모르포시스의 일그러짐과 왜곡은 이미 보편이나 정상에 대한 심대한 위협이요 도전이다. 그것은 제 삼의 입장, 제 삼의 시야가 개입된 결과로, 사물을 만나고 인식하는 우리의 고정관념에 일대 혼란을 초래한다. 그것은 우선 원근법적 인식, 곧 대상계 전체를 우리의 동공 앞에 정렬시키려는 인문주의(humanism)에 시비를 걸어온다. 아나모르포즈는 왜곡이 단지 지각상의 불편함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곧 인식의 불안과 위기감으로 전이된다.

 

소외자의 미학이 주는 인식론적 교훈


1533년,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이 그린 그림 <대사, Les Ambassadeur>는 가장 탁월한 아나모르포즈의 예다. <대사>는 제목 그대로 당시 영국에 머물던 프랑스 대사 장 드 댕트빌(Jean de Dinteville)의 초상화다. 대사는 목에 수호천사 생 미쉘(Saint-Michel)을 상징하는 메달을 걸고 있다. 그 오른쪽엔 그의 친구이자 라보르의 주교인 조르쥬 드 셀브(Georges de Selve)가 서있다. 이 두 인물은 세속과 종교의 분리된 두 주권을 상징한다. 대사와 주교의 얼굴에 감도는 긴장감엔 당시 불거지기 시작됐던 헨리 8세의 억압과 영국교회의 분리가 반영돼 있다.


두 인물 사이의 낮은 선반에 놓인 찬송가는 루터교에 대한 화가의 동의와 친근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보다 높은 선반엔 별자리가 표기된 구와 지구본, 이동용 해시계, 다면체로 된 해시계 등이 보이는데, 그것들엔 새로이 도래하는 근대적 세계(le monde modern)의 지식과 전통적 지식인 콰드리비움(음악, 산술, 기하, 천문)과 트리비움(논리, 문법, 수사)에 대한 경의가 담겨있다.


이 모든 것들은 화가 홀바인을 르네상스기의 전형적인 인문주의자로 간주하는 단서로 이해됐다.


그런데 우리의 시선은 그림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도무지 쉽게 식별할 수 없는 한 형상 앞에서 정지된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사선방향으로 길게 늘어진 수수께끼 같은 물체가 해골의 형상임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왜 하필 해골이며 그 왜곡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15세기경 북유럽의 도상학에 의하면, 특히 모서리가 깨진 벽돌이나 책, 두루마리, 꺼진 촛불 등을 동반하는 불안전한 형태의 해골 형상은 과학과 기술의 공허함을 지적하는 의미로 사용됐다.


이같은 홀바인의 안티는 해골의 아나모르포즈를 통해 보다 극적인 것이 된다. 이 왜곡은 그림의 다른 부분들을 보는 시선으론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은 한 쪽으로 심하게 치우친, 측면의 임의의 한 점에서 볼 때에만 비로소 자신이 해골임을 드러낸다. 그림에는 이미 화면의 나머지 전체를 구성하는 시선 외에 또 다른 제 삼의 시선이 개입해 있는 것이다. 이 낯선 시선은 정상적인, 즉 정면적인 바라보기와 충돌하고 원근법적 투시에 오류를 일으킨다. 홀바인의 아나모르포즈는 근엄한 전통들을 흔들고, 과도한 근대를 뒤트는 고도로 상징적인 장치였던 셈이다.


현대미술에서 아나모르포즈의 한 흥미로운 예를 장 디베(Jan Dibbets)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역시 정확하게 임의의 한 점에서만 ‘그렇게’ 보여지도록 계산돼 있다. 정확하게 그 점에서만 사다리꼴이 정사각형으로 보이고, 타원이 원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같은 디베의 ‘조정된 원근법’(perspective corrigee)은 우리에게 관찰과 진실이 늘 일치하지 않는다는, 인식론의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한다.

 

시선의 권력을 뒤흔드는 해방의 경험


아나모르포즈의 전복의 힘은 이처럼 이단적인 시선, 혹 타자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데에 있다. 그 이단은 임의의 한 점에서 비롯되지만, 이 한 점은 자신의 질서를 강제할 수 있다. 따라서 아나모르포즈는 단지 광학적 차원이상이다. 그것은 권력의 문제며 선택과 강요의 문제인 것이다. 하나의 채택된 공간적 코드를 극대화함으로써, 기존의 지배적인 공간권력을 폐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나모르포즈는 소외된 관점과 그것의 역전의 문제이기도 하다. 시선이 아나모르포즈에 주목하는 순간 소외된 의식이 부상되고, 이로써 주류담론엔 역소외의 일대 타격이 가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보편질서를 배설해버리는, 이를테면 해방미학의 한 전조임에 틀림없다. 아나모르포즈는 분명 통쾌한 경험이다. 그것은 임의성과 반도그마티즘으로 향하는 문이자 소외자의 미학인 것이다.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자면, 타자의 시선이 마치 만능처럼 과장돼서는 안 되리라는 점이다. 열림과 해방이 곧 정신의 지평을 늘릴 것이란 믿음도 착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소외된 관점이 우리 가슴에 티눈처럼 박힌 도그마를 직시하도록 돕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궁극적인 지향이 될 때, 그것은 하나의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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