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18.11.7 수 13:35
기획과학
진화론 150년, 오해의 역사[특집]
최화진 편집위원  |  drum57@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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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호]
승인 2006.07.06  00: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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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역사엔 스펙트럼만 존재한다”



김우재 / 포항공대 분자생명공학부 박사과정

 

전 세계 생물학자들의 영웅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이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출판한지 백년이 훨씬 지났지만, 다윈과 그의 진화론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진화론의 역사는 많은 오해들로 점철되어 있는데 이 중 ‘계층화’에 얽힌 오해보다 더 지독한 것은 없을 듯 하다. 다윈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회학자 스펜서(Herbert Spencer)는 이를 사회적 진화론으로, 프랑스의 신부이자 고생물학자였던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은 이를 오메가 포인트로, 히틀러(Adolf Hitler)는 이를 게르만 민족주의로 표현했다. 하지만 유전학자 멀러(Hermann Joseph Muller)의 말처럼 “다윈에 대한 몰이해는 1백년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의 두뇌는 이러한 ‘계층화’에 능하고 익숙하다. 얼마 전 타계한 미국의 고생물학자 스테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이를 “모든 사물을 선형으로 증가하는 가치로 서열화 시키려는 경향”이라고 정의했다. 굴드에 따르면 서구의 네 가지 나쁜 지적 전통은 환원주의, 계층화, 물화, 이분법이며 진화에 대한 오해도 이 네 가지 전통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내기를 하나 걸자.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진화를 ‘진보의 사다리’ 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여러분의 잘못은 아니다). 아마도 그런 분들에겐 박테리아로부터 원형동물, 무척추동물, 척추동물, 포유류, 영장류, 인간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를 오르는 과정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진화엔 목적이 없다. 진화는 환경에 맞추어 그때그때 땜질하는 식으로 조잡하게 이루어져 온 생명체들의 서사시다. 그래서 고래는 다리로, 펭귄은 날개로 ‘헤엄’친다. 굴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화란 “사다리가 아니라 무성한 나무 가지를 가진 나무”에 비유할 수 있는 과정이다. 진화의 무목적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교과서에 그려진 계통도를 머릿속에서 과감히 지우고 모든 생물을 원시 박테리아를 중심으로 둥글게 나열시켜보라. 인간은 그 가장자리의 약간을 차지하고 있는 영장류일 뿐이다.

 


 

진화론의 계층적 사유는 차이를
우열로 해석하고,
계층화시키는 이데올로기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우수성은 진정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여러분과 나의 작은 만족감을 위해 흔히 인간만이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인간을 가장 우수한 종이라고 오해하게 만드는 사실들을 분석해 보자. 우선 두뇌의 절대 크기에 있어서 인간은 코끼리나 고래의 1/4에 불과하다. 이를 신체크기에 대한 두뇌크기의 비율로 환산할 경우 고래나 코끼리보다 인간은 월등히 낫지만, 다람쥐보다는 못하다. 그래도 인간의 두뇌에는 뭔가 더 복잡한 비밀(아! 예를 들어 대뇌피질의 주름)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면, 주름 수에 있어서도 인간은 돌고래에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인간의 직립보행은 이미 수백만 년 전부터 캥거루도 해오던 것이고, 도구의 사용도 많은 동물, 심지어 곤충들에서도 발견되는 행동양식이다. 굳이 인간의 우수성을 꼽자면 손을 잘 사용한다는 점과 다른 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복잡한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꼽을 수 있지만 이런 특징들도 인간에게만 유일한 것은 아니다.


만약 인류가 ‘의식’의 우수성을 바탕으로 진화의 정점에 선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군함조는 그 빠른 비행속도로, 박쥐는 초음파로, 바퀴벌레는 질긴 생존능력으로 진화의 정점에 서 있다고 말해 주겠다. 인간은 조금 더 영리한 동물에 불과하다. 우리가 인간의 척도 이외의 것으로 우리를 바라볼 수 없는 한 이러한 오해는 계속될 것이다(화성인이 되어보라!).


최근 IQ와 국가소득간의 상관관계를 다룬 논문 한편이 등장했다. 언제부터 IQ가 인간의 우수성을 설명해주는 지표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지능으로 사람을 서열화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지능의 차이는 주로 집단 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다. 집단 내의 차이는 집단 간의 차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백인종 집단내의 IQ 빈도차이가 흑인종이나 황인종과의 비교로 이어질 수는 없다는 뜻이다. 집단간의 차이가 집단내의 차이보다 커지는 것을 종분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류가 각 인종으로 나뉘어진 것은 수 만년도 안 된 최근의 일이며, 그 시간은 종분화가 일어나기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우리는 희거나 검거나 노랗거나 모두 같은 종이다(백구도 점박이도 검둥이도 모두 개인 것처럼). 리처드 르원틴(Richard Lewontin)의 말처럼 “뉴기니의 깊은 삼림 속에 사는 작은 부족이 유일한 생존자로 남았다 해도 오늘날 50억 인구의 무수한 집단들 속에 표현되어 있는 모든 유전적 변이는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비슷하다.


지능의 일부는 유전되고 개인간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화의 추진력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극복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것은 아니다. 지능에는 유전적 소인만큼 환경적 소인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환경에 반응하며 발달할 수 있는 가소성을 지닌 두뇌를 가지고 태어난다. 두뇌는 모든 것을 프로그래밍 해두기에는 너무나 좁은 장소이며, 자연선택은 앞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능이 높은 사람이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은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지능은 자연선택으로부터 자유로운 형질이다. 게다가 지능에 대한 명확한 정의조차 없다.


인간은 자연에 존재하는 차이에 주목하고 이를 분류하는 습성을 가진, 호기심 많은 동물이다. 린네(Carl Linneaus)는 모든 생물들을 분류하려고 노력했고,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종들을 서열화했다, 아니 해야만 했다. 최초의 지능연구자들은 지능에 따른 인종의 서열화를 주장했다.
이 모든 것들이 차이를 우열로 해석하기 좋아하고, 차이를 단선적으로 계층화시킨 후에야 만족하는 우리의 정신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르다는 것이 틀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산이 산이고 물은 물이듯, 다른 것은 그저 다른 것일 뿐이다(개그는 개그일 뿐이다). DNA라는 불멸의 나선이 이룬 생명의 역사엔 피라미드가 아닌 스펙트럼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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