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공포 ①]

진성오 / 심리학과 박사과정


 

 

22세의 남자 대학생인 내담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공공 장소에 나갈 때면 언제나 사람들의 눈치를 살핀다. 그들이 혹시 자신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식은 땀을 흘린다. 다소 수줍음이 있고 똑똑하기만한 내담자는 집에서만 생활 하려고 하며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지내는 것을 낙으로 생각한다. 그에게는 자기 또래의 친구들과 같이 피시방을 가거나 식당에서 밥을 먹는 등의 사회적 활동은 하고 싶은 일 중의 하나이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이와 같이 심한 불안으로 인해 대중 앞에서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연설을 할 수도 없으며 공공장소 자체에 나가지 못하는 등의 행동을 보이는 경우 정신병리학에서는 사회공포증(social phobia)라고 정의한다. 사회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표현을 무색하게 만드는 행동들을 한다. 사회공포증도 공포증의 한 종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공포라는 것이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인간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되는 긍정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우리가 주변환경이나 낯선 사람에게 두려움이 없다면 그 만큼 생존에 대한 가능성이 적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 공포란 인간과는 떼어 낼 수 없는 본성 중의 일부인지 모른다.

공포는 인간의 긍정적 본성

정신분석에서는 개별적 인간 개인은 출생의 순간부터 공포를 경험한다고 설명한다. 우리 모두는 태아시절과 신생아 시절 어머니에게 의지하는 기생충 같은 생활을 하고 지낸다. 이러한 생활은 아이에게 과대망상(megalomania)을 만들고 좋은 것은 모두 자신이 한 것이고 나쁜 것은 모두 자신 밖의 어떤 것이 한 것으로 여기는 사고 과정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때 아이들은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의 행동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다.

그로 인해 다음과 같은 공포를 경험한다. 예를 들어 굶어 죽지 않을까 하는 공포는 배가 고프거나 할 때 우유병이나 엄마 젖이 입에 늦게 들어오는 경우 경험하게 된다. 또 잡아먹히지 않을까 하는 공포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마치 내가 어머니의 젖을 빨아먹는 것처럼 어머니가 나를 그렇게 먹어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다. 그리고 아기는 독극물이 든 음식을 먹고 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가진다. 이는 어머니가 나쁜 음식을 잘못 알고 줄 때의 경험으로 생겨난다고 한다. 이러한 공포 경험의 밑바닥에는 성인이 되어서도 유지되는 하나의 기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자신의 공포의 원인을 밖의 대상에서, 혹은 타인에게서 찾아서 두려움을 해결하려는 태도이다. 그래서 개인의 공포는 확대되어 사회라는 공간 안에서 그 어둠을 더욱 강하게 드리게 되고 이성적인 존재들을 광폭하고 잔인한 집단으로 바꿔 놀 수도 있다.

사회라는 공간 안에서는 공포가 그 개인만을 두려움에 떨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공포라는 형태로 표현된다. 그럴 경우 우리는 두려움에 의해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에서 타인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며 스스로가 공포인 존재로 바뀌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일상적 공간의 공포화

역사적으로 이러한 모습은 생존을 위해 주변의 환경과 투쟁하며 경험하게된 자연이 주는 두려움에서부터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은 어둠, 악마, 마귀 등의 형태로 상징화되어 회피해야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더불어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들이 인간의 공포의 대상으로 형상화되었다. 질병이나 자연재해, 전쟁 등과 같은 요소들도 인간에게 있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두려움이 인간의 정신에 그림자를 드리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 공포를 통제하기 위해 그 희생양을 항상 밖에서 찾았다. 이러한 내면적 공포에 대한 외부로의 투사된 대표적인 예들은 세기말의 시기에서 쉽게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공포로 인해 우리는 이성적인 사고가 마비된다. 그 순간 생존이 절대 선이 되어 어떤 일이라도 행사하게 되는 모습을 보게된다.

기독교의 세기말적 신앙이 주는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 중세 사람들은 마녀라는 속죄양을 통해 그 공포를 상징화하고 선의 이름으로 불태웠다. 21세기로 넘어가는 새로운 천년을 앞둔 시점에서 우리들은 수많은 UFO와 우주 어딘가로 부터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우주인에 대한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위협한다고 생각되는 타인들은 모두 공포의 대상으로 여긴다. 따라서 그 뿌리까지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는 공포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이라크의 아이들에게 그 많은 폭탄들을 쏟아 부은 과학문명의 국가가 보인 행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공포와 관련된 이러한 인간의 행동들은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어찌할 바 모르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통제하는 심리적인 방어본능의 하나이고 원시시대나 과학 문명의 현대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한편으로 보면 지금 우리의 삶 그 자체가 공포스럽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화재들이 발생하여 우리의 아이들이 불에 목숨을 잃었다. 가장 일상적 공간인 지하철이 생활의 한 가운데에서 화장터로 변하는 사건들은 공포증이 우리의 한 부분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정말 이보다 더욱 무서운 공포는 마치 어둠을 밝히기 위해 빛을 비출수록 우리 자신은 더욱 어두워지는 것처럼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공포의 이유를 밖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 사건들의 희생양을 찾는 것이다. 자신이 잔인해 질 충분한 이유가 있고 타인에게 어떤 형태의 폭력이라도 행사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오해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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