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공포 ②]

구연상 /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오늘날 공포는 영화관 또는 귀신의 집에나 있지 우리 자신에게는 없다. 공포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공포의 부재는 현대인들의 지식 확장보다 자기망각의 결과이다. 위협받을 자기가 없는 곳에서 공포는 결코 피어날 수 없다. 현대인들이 실제로 느끼는 공포는,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chnamurti)가 말하는 바처럼, 만족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사실로부터 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만족 상태에 빠져든다는 것과 공포의 기분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 정신적 스승이라 불리는 크리슈나무르티에게서 공포현상이 이토록 자의적으로 해석되는 까닭은 공포에 대한 철학적 연구가 너무 미진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중요한 업적은 다음의 두 철학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키에르케고르(Soeren A. Kierkegaard)는 <공포와 전율>에서 공포를 성서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공포는 자기 것을 버려야만 한다는 측면과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아가멤논이 자신의 소중한 딸 이피게네이아를 국가를 위해 신의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공포스러운 일이다. 그의 행위가 영웅적 행위가 되는 까닭은 그가 공포를 극복하고, 대신 국가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반면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신께 바치려 한 행위는 공포를 극복한 위대한 행위이긴 하지만, 그 행위에는 ‘보편적이거나 윤리적인 가캄가 완전히 배제되고 철저히 개인적인, 즉 단독자적인 차원만이 남는다.

전율을 낳는 단독자의 ‘제것-버리기’

영웅의 행위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도 되고, 추앙도 될 수 있는 반면, 단독자의 행위는 누구에게도 이해될 수 없고, 더 나아가 징벌의 위험까지 안고 있다. 아가멤논과 아브라함의 ‘제것-버리기’는, 키에르케고르에 따르자면, 둘 다 ‘무서운 일’이긴 하다. ‘보편적인 것을 위한 제것-버리기’는 그 행위가 모든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안정성을 낳는다. 그러나 ‘개체적인 것을 위한 제것-버리기’는 그 행위가 누구에게도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전율[떨림]을 낳는다. 따라서 공포[무서움]는 우리가 ‘제것 모두’를 ‘다른 사람들과의 절대적 단절을 위해’ 버려야만 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믿음[믿는 사람]’으로서의 아브라함이 더욱 무서워하는 바는 그가 ‘제것-버리기’의 무서움에 사로잡혀 신의 말씀을 좇지 못하게 되는 것, 그로써 신에게 버림받는 것, 즉 구원의 상실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공포의 현상을 세 관점, 무섬거리(공포의 대상)와 무서워함 그리고 ‘무섬의 까닭(공포의 이유)’에 따라 분석하고 있다. 그에게 공포는 우리의 ‘세계 속에 있음(das In-der-Welt-sein)’을 그 위협 가능성에서 열어밝히는 기분, 또는 ‘자기 자신’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낄 때의 기분으로서 규정된다. 이때 무섬거리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 즉 위협적인 것 또는 위협의 성격을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이 된다. 그러나 어떤 것의 위협 가능성은 우리가 이미 그것의 있음의 의미 전반에 대한 앞선 이해를 갖고 있을 때만 주어질 수 있다. 예컨대 우리에게 친숙한 부엌칼은, 그것이 무기로 쓰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앞서 이해되어 있을 때만 무섬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칼의 위협이 느껴진다 해서 우리가 언제나 칼에 의한 해를 당하는 것은 아니다. 칼과 같은 무섬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중의 성격을 갖는다. 그런 한에서, 무서워함은 자기 자신이 이러한 무섬거리의 위협 가능성을 직접 느끼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공포가 느껴지고 있는 상태, 그것이 곧 무서워함이다. 만일 누군가 공포를 전혀 느낄 수 없다면, 즉 그가 아무 것도 무서워할 수 없다면, 그에게 공포는 일어날 수 없다. 하이데거는 무서워함을, 무섬거리가 우리 자신에게 다가와 관계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줌’으로서 규정한다. 이 말의 의미는 무섬거리는 무서워함이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존재의 성찰에서 유래하는 공포

그런데 우리가 무섬거리의 위협 앞에서 공포를 느끼는 까닭은 무섬거리 자체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 때문이다. 자기에게는 늘 ‘자기가 있다’는 사실이 문제된다. 공포는 자기가 ‘위협의 세계 속에 내던져져 있다’는 당면 현실을 자신에게 드러내 준다. 우리가 무섬거리를 무서워하는 까닭은 그것의 위험이 ‘나 자신’에게로 향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무섬의 까닭(공포의 이유)은 우리가 자신의 있음의 가능성을 염려한다는 데 놓인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전혀 돌볼 수 없다면, 그는 아무런 공포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불안>(청계, 2002)에서 공포의 시간 성격을 ‘아직 닥치지 않았음’으로 규정함으로써 공포 현상의 가장자리를 확실히 제한했다. 공포거리는 우리 자신에게 닥쳐오긴 하지만, 그러나 아직 닥쳐와 있지는 않은 것이다. 닥쳐오는 공포거리가 우리에게 실제의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려면, 그것은 안전장치가 풀린 상태 또는 통제불능의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불러일으켜진 공포 자체가 가슴으로 느껴지고 있어야 한다. 공포의 이러한 기분 성격들은 우리말 ‘으름’에 의해 통일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공포는 ‘아직 닥치지 않은 무섬거리’에 의해 우리 자신이 가슴으로 을러지고 있을 때의 기분을 뜻한다.

그런데 공포감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 까닭은 우선 무섬거리의 으름에 의해 을러지는 정도, 즉 ‘무섬-탐’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무섬-까닭(공포의 이유)’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섬의 까닭은 우리가 무섬거리로부터 달아나 안전한 곳으로 피하려 한다는 데서 찾아질 수 있다. 이러한 피하려 함은 우리가 자신의 안전에 대해 늘 마음을 졸이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공포는 닥쳐오는 무섬거리의 으름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안전에 심각한 탈이 날 것만 같을 때의 기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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