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공포 ③]

고봉준 /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연구원


 







 

공포의 계절이 돌아왔다. 해마다 여름의 극장가는 블록 버스터와 공포영화의 한 판 전쟁으로 시작된다. 공포영화는 선글라스, 수영복과 더불어 여름에 가장 잘 팔리는 유행 상품이다. 어디 영화뿐인가. 소복 차림의 처녀 귀신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입에 물고 등장하는 <전설의 고향>이나 납량 특집물 역시 ‘공포’라는 인간의 원초적 감정을 자극하는 경향에 불과하다.

근대가 추방한 것들의 이름, 공포

익히 알려진 것처럼 공포의 기본적인 색깔은 검은색이며, 그것의 고유한 시간성은 ‘밤’이다. 그렇다면 이 어둠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근대라는 합리적 이성의 ‘빛’이 추방한 신화와 전설, 민담의 색깔이다. 근대의 계몽적 이성은 이전 사회의 지배적 에토스들을 미신이나 주술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하고 배제하면서 등장했다.

그래서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전설은 영화 속에서 항상 현실로 나타난다. 결국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 탄생한 ‘영화산업’은 자신이 밀어낸 전근대적 가치들을 ‘공포’라는 방식을 통해 재전유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유령이나 괴물, 또는 초자연적인 대상들은 억압된 욕망과 타자들, 다시 말해 근대 이전의 가치들이다. <디 아더스>라는 영화의 제목은 얼마나 상징적인가.

공포영화의 기원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빅토리아 시대) 사이에 등장한 고딕 문학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공포영화는 독일표현주의 영화를 거쳐, 초자연적인 사건이나 악령·악마를 소재로 하는 오컬트(occult) 영화에 와서 시작되었다. 오컬트는 이전의 고딕적 배경과는 달리 공포를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엑소시스트>나 <오멘>인데, 이들 영화는 부르주아적인 일상이나 서구적 가정의 붕괴를 주요한 모티프로 삼고 있다.

공포 영화의 등장이 갖는 사회학적 분석들, 가령 “특정한 이념이나 주의·주장이 전면화되거나, 또는 정치적·경제적인 측면에서 사회가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공포 영화가 등장한다는 마이클 라이언의 지적은 이런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또한 이데올로기적인 맥락에서 접근하면 공포영화는 반동적인 요소들도 상당수 포함하고 있다.

가령 70년대와 80년대에 개봉된 공포영화들은 당대의 문화적 불안감, 즉 가정의 붕괴와 청소년 문화의 급성장, 정치적 지도력의 부재와 성적 일탈이라는 사회적 맥락을 배경으로 하지만, 영화 속에서 대중들의 욕망은 언제나 희생의 직접적 동기가 된다. 이처럼 공포영화는 사회적 욕망을 ‘폭력’과 ‘공포’에 의해 봉합함으로써 기존의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기도 한다.

90년대 이후 공포영화의 주류는 두 가지로 압축되고 있다. 하나는 이른바 ‘난도질 영화’라고 불리는 슬래셔(slasher)/스플래터(splatter) 장르이다. <스크림>과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등으로 대표되는 슬래셔/스플래터에서 ‘공포’란 ‘살육의 스텍터클’이며 ‘잔혹성의 미학’이다. 그리고 이들 난도질 영화의 주요 희생자는 백인 ‘여성’, 특히 ‘성’에 눈뜬 십대들이다. 십대들의 방탕한(?) 성생활이 살인이나 희생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공포영화의 오랜 관행이자 공식이다.

살인마에게 쫓기는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살해당한다. 재난영화가 그렇듯 공포영화는 부르주아적 일상이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킴으로써 삶을 ‘공포’로 정의한다. 이들 영화에서 희생자들이 죽음에 이르는 방식은 대단히 폭력적인데, 살인마와 희생자의 쫓고 쫓기는 장면은 언제나 ‘강간’을 연상시킨다. 기성세대의 눈길을 벗어난 공간에서 벌어지는 십대들의 섹스와 그들의 일탈을 응징하는 살인마의 등장, 연이어 벌어지는 피의 제전과 절단된 육체는 공포영화가 도덕적 금기를 넘어선 십대들에게 가해지는 초자아의 사회적 징벌임을 보여준다.
 


특히 슬래셔 영화는 관능적인 여성의 육체를 난도질을 통해 몇 점의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린다. 절단된 사지와 해체된 신체는 육체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서구적 미에 대한 공공연한 조롱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공포가 아니라 잔혹함이다. 잔혹이 공포가 되기 위해서는 눈으로 보는 것이기 이전에 몸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십대들은 비싼 입장료를 내고 ‘공포’를 즐기려는 것일까. 그것은 공포영화가 지닌 내러티브의 동일시 전략 때문이다. 공포영화는 청춘스타들을 대거 등장시킴으로써 영화의 주고객인 10대와 20대들을 영화관으로 불러들인다. 청춘스타와 그들의 섹스, 그리고 엽기적인 폭력이라는 삼박자는 공포영화의 흥행에 있어 필수 조건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치들은 관객이 영화의 희생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최대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므로 감독이나 제작자는 보다 많은 희생자들, 그리고 보다 젊고 매력적인 인물들을 등장시키려는 경향을 보인다. 충격이 커질수록, 그리고 폭력의 수위가 올라갈수록 동일시의 효과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공포영화의 등장인물들이 대개 평범한 청춘남녀이거나 학생인 까닭 역시 동일시의 전략 때문이다.

<디 아더스>, <검은 물 밑에서> 돌아오다

최근 들어 급상승하고 있는 공포영화의 또 다른 장르는 유령이야기이다. <링>과 <검은 물 밑에서>, <여고괴담>과 <디 아더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공포영화가 ‘유령’이라는 존재를 선호하는 까닭은 그것이 다분히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소재이기 때문이다. ‘유령’의 등장을 통해 공포영화는 가시성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이러한 신비주의 전략은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인 두려움의 투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근대적 질서 하에서 삶의 영역으로부터 추방당한 존재들이 의미를 획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라는 것은 공포영화의 핵심적인 공식이다.

억압된 대상인 타자란 단적으로 ‘나’ 또는 ‘우리’와 대비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우리’란 합리적·도구적 이성을 공유하고 있는 백인 중산층의 가부장적 남성을 의미한다. 공포영화에 정신병자나 광인, 어린이, 여성, 동성애자 등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공포영화는 억압된 존재들의 귀환에 관한 영화이며, 정상성과 질서에 대한 그들의 심각한 도전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령영화는 오컬트나 괴물 영화와는 달리 질서의 회복으로 종결되지 않는다. 이는 억압된 것의 영구적인 억압, 즉 과잉억압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억압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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