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이런 현상이 여성에게 더욱 외모의 중요성을 강요하는 사회적 현실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외모주의는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면서도 가장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차별형태”라는 낸시 에트코프(Nancy Etcoff)의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요즘이다. 실제로 외모가 자본이 되고 자본이 외모를 만드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 때문에 몸을 만드는데 비용과 정력을 지불하는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해, 이는 시장의 음모이며 왜곡되고 획일화된 미의 기준의 확장에 불과하다. 나오미 울프(Naomi Wolf)가 <미의 신화>에서 “아름다움은 정치에 의해 결정되며 현대 서구사회에서 남성의 지배를 공고히 만드는 최선의 마지막 신념체계”라고 가부장제와 연결해 강변한 것을 절대적으로 수용하지 않더라도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한 선택을 통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려고 한 것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수용하기 어렵다.

수잔 보르도(Susan Bordo)의 지적처럼 “대중매체를 통한 이상화된 이미지가 미의 균일화와 표준화 효과를 초래하며 이는 여성들에게 지속적인 측정과 교정을 요구한다”는 것 때문이다. 나아가 캐스린 모건(Catherine Morgan)은 “성형수술에서 여성의 선택이란 강요된 미의 표준에 순응할 선택, 성차별·고령자 차별·인종차별·장애인차별의 지배적인 문화의 승인을 얻을 선택, 기술에 종속될 선택 등을 의미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바비인형처럼 강요된 미의 표준 때문에 절반이 넘는 한국의 여대생이 저체중에 처해 있는 우리 현실이 답답하기 그지없다. 고답적인 말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아름다움은 수치나 형태만으로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태도와 방식에서 나타나는 전인격성이라는 것은 진실이다. 또한 다양성이 존재하는 자연생태계가 아름답듯이 인간과 사회생태계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욕망은 무죄다. 다만 ‘채움과 비움이 자유로운 존재’가 아름답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욕망의 자율적 조절이 필요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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