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10.9 금 13:00
기획사회
교회건축의 딜레마, 수상한 파시즘사회공간
허민호 편집위원  |  slnabro@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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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호]
승인 2006.07.03  16:3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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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삼 / 건축비평가

모름지기 몸값 부풀리기의 시대다. 최근 뉴스를 접해보니 외국의 프로축구 선수 세브첸코의 이적료가 790억원, 주급 2억1,000만원, 연봉 160억원의 시대가 열렸다고 호들갑이다. 사람 몸값이 이렇게 부풀려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가 지닌 축구재능에 대한 평가액이 하나고, 그로 인해 예측되는 홍보효과의 평가액이 다른 하나다. 또한 중간상인들의 치밀하게 계산된 중계수수료가 또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우스개 소리로, 그렇다면 예수님과 부처님의 몸값은 얼마나 할까. 그 천문학적인 숫자를 가늠해볼 수 있는 방도는 없다. 추정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 시대에 존재하는 교회와 절집의 부동산가액과 매주, 매년 걷히는 신자들로부터의 수입의 총합으로나 가능할 것이다. 어림짐작으로도 인류역사상 이분들의 몸값에 근접한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일까. 요즘 국내 도시에 건축되는 교회들의 규모가 날로 커지고 있다. 더러는 1만 명 이상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실내체육관형 혹은 대공연장형의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교회건축이 규모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를 들자면 그곳이 곧 하나님의 몸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대형화 되면서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프로그램들이 개입되었다. 율법의 수행과 무관하게 일단 교회의 관리운영에 대한 프로그램이 필요해진 것이다. 따라서 교회도 효과적인 경제마인드를 우선시하게 되었다. 하늘에 쌓는 상급의 크기 운운하면서 교회에 들어선 신자들의 등급을 매기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는 것이다.

거대화된 감사의 표상
교회는 예수님이 인류의 대속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상징적인 장소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구원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목회자의 으름장에 쉽게 오금을 졸이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교회는 신자가 내어놓는 헌금의 크기로 축복받은 교회임을 강조하게 되고 그것은 곧장 거대한 교회의 건축으로 표상 되는 셈이다. 결국 작은 교회는 그 안에서 나눠지는 신앙의 깊이와 달리 목회의 강도와 무관치 않다는 얘기다.
교회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장소성을 갖는 곳이기에 그곳에선 찬양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교회는 원칙적으로 거대한 소리의 울림통이란 역사성을 갖는다. 그러한 전통은 오늘날에 이르러 교회 본당이 공연장으로 되어가는 추세로 나타나고 있다. 찬양이라는 행위와 더불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공연문화는 교회의 또 다른 수입원으로 기능한다. 어지간한 국겙片낡貶Ю?못지 않는 입장료와 그에 상응하는 초호화 출연진이 교회를 찾는다. 그 바람에 교회건축의 설계지침 중 중요한 하나가 지역사회의 문화적 보급로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다. 상업적으로 뮤지컬, 오페라 등 고급 공연문화가 대중적 호응과 함께 줄줄이 성공신화를 써내려간다 해도 대다수의 일반 주민들과는 거리가 먼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문화적 혜택의 소외권에 머물고 있던 지역주민인 교회신자들을 찾아오는 대형 예술인들은 그 자체로 반가운 것이다.
이는 교회건축의 공간프로그램에도 많은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본당의 시설계획에 조명과 음향 및 영상설비의 최적화를 당연시하게 되었고 평소 예배를 위한 좌석수를 상회하는 과도한 좌석의 본당 평면을 생산하게 되었다. 필요 이상의 체적을 갖는 본당은 건물의 유지 관리 면에서도 과다한 비용지출의 원인 제공처가 된 것이다. 빛의 건축을 당연시해왔던 종교건축의 교의가 쉽게 수정되었고, 교회는 빔 프로젝트가 비추는 초대형 영상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다수의 신자들이 붙어 사는 것이 교회건축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라면 이 같은 현대 교회의 변화는 제대로 되어가는 것임에 분명하다. 서방국가에서 교회가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근대이전의 사회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국내 교회의 부흥은 ‘늦은 비’의 수혜자로서 한국 교회의 존재감을 키우게 되었고, 교회건축의 향방도 그에 영향을 받은듯 우리 도시를 구축하는 중요한 건축테마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교회 창립자의 목회 구도가 가계로 대물림이 되어가는 세태도 빚어지고 있고, 목회자의 정년에 대한 교회내분도 사회적 이슈가 되곤 한다. 대부분 이름난 교회, 이름난 목회자가 관련된 일이다. 하나님의 종이 세습되는 것은 구약에서 익히 익숙한 것이라서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들은 세상이 변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목회자에게 정년이라는 제도도 가당치 않다는 그들의 의식구조도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사역은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라는 구교의 신학적 태도에 기인하는 것이다.
점차로 개신교의 수장들이 권위와 위엄을 찾는 일에 골몰하고 있는 현상도 교회건축의 외적 성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경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구원을 확인받기 위해 몰려오는 신자들에게 교회는 덩치가 클수록 은혜의 강도가 높음을 현시한다는 인식이 바탕이 되어 보다 높게, 보다 크게, 보다 화려하게 공간을 꾸미고 형태를 만들어왔으며 그 중심에 하나님의 종이 갖는 능력이 비례한다는 믿음이 교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기도보다 두 사람의 기도가, 나아가 그보다 많은 사람이 합력하여 기도하였을 때 축복의 크기가 다르다는 신앙지도가 교회의 수적 양산과 교회의 거대주의를 묵인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개척교회를 꾸리는 젊은 목회자들마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건축하는 행위가 일생일대의 목표가 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셋방에서 임대료를 지불하며 하나님의 사역에 나서는 그들이 항차 새 교회를 건축봉헌하면서 주머니 돈의 크기에 구애됨 없이 일부터 저질러보는 세태가 만연해 있다. 나아가 대출받은 건축공사비로 평생 은행 이자를 내야하는 국면에 이르러서까지 의지를 굽히지 않고 신자들이 앉아 있는 개개인 자리의 평수를 계산하여 일괄적으로 얼마 이상을 건축헌금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태까지 빚어지고 있음은 해프닝이라고 하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교회건물의 익명화
우리의 교회가 어느덧 예배공간의 임대업을 자처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커피전문점 스타벅스의 매장 임대업과 차이가 없다. 실례로 요즘 지어지는 교회들 대부분이 신자와 비신자에 대한 사용자 층의 구분 없이 카페테리아 등 상업공간을 앞 다퉈 입주시키고 있다. 명분은 분명해 보인다. 작은 수입이지만 그것이 교회의 살림에 이바지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기능적 유형이 변하고 있는 셈이다. 덩달아 공간적 유형도 발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교회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없다면 한눈에 교회건물임을 알 수 없는 건축 또한 어렵지 않게 수용되고 있다. 복합용도의 공간에 편의적으로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셈이다. 이는 십자가의 존재로 인하여 익명 건물의 교회되기가 아니라 교회 건물의 익명화 수순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심지어 개신교 내에서도 교리해석과 목회자의 의지에 따라 본당에 십자가를 설치하지 않는 교회가 수두룩할 뿐더러 몇몇 교회는 주일 예배시 본당 제단에 영상으로 십자가를 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지경이다. 상징이라는 것의 의미해석에 대한 자유로운 발상에 시선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교회의 본령이 그만큼 위협받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우리 교회가 처한 공간적 지위는 경제적 발전의 속도와 함께 놀랍게 향상되었지만 반면에 교회의 안팎에서 발견되는 건축의 모습은 지금의 대다수 교회가 겪고 있는 프로그램의 혼잡도로 미루어 보건대 바로크 건축의 시대 이후 교회의 권위 혹은 생존권을 걸고 사투를 벌이고 있는 흔적의 복합체라 아니할 수 없다. 종교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의 부담이 가중되고 사람들이 교회가 구원의 장소라는 맹목적인 인식을 거부하며, 귀족화 되어버린 몇몇 성공적인 목회자들의 군림을 경원하는 세태에 직면하여 교회는 성경에 준하여 율법을 고수하는 것이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보는 교회의 건축은 구약의 방주를 쉽게 떠올리거나 크고 작은 상업공간의 닮은꼴로 보이며 방향을 잃은 선단과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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