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듬살이

여성어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여성어가 무엇인지부터 시작해야한다. 여성어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언어이다. 여성어는 남성어와의 차이를 통해서 구분된다. 여성어는 발화자나 표현 대상의 성별 혹은 언어 속에 성차별적 요소가 있는가에 따라 구분된다. 여성어가 한 마디로 규정짓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여성이 말하고 듣고 인식하는 언어가 상당히 많은 곳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1970년대 이후 여성주의적 언어학이 학문의 새로운 분야로 정립되면서 여성어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고 있다.
여성어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장 주되게 언급되는 것은 여성어이든 남성어이든 그 쓰임이 지극히 남성중심적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네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남성을 지칭하는 말이 남성과 여성을 모두 포함하거나 대표하는 경우이다. 영어에서‘History’(그의 이야기)가 역사를 뜻한다거나, 우리말의 아들이나 딸을 통합해서 ‘자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예이다. 두 번째는 남성과 여성을 가리킬 때 ‘소년소녀’, ‘남녀문제’, ‘자녀 교육’과 같이 남성이 앞에 오고 여성이 뒤따르는 방식이다. 세 번째는 여성이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 속어나 비어 등의 부정적인 뜻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년놈들’이나 ‘애미애비도 모르는 자식’등이 그 예이다.
여성어가 성차별적인 요소를 가지고 남성중심의 언어 속에 포섭되는 네 번째 방식은 가장 극적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음의 존재방식이다. 여성어가 학문의 분야로 정착되어 가는데 반해 남성어는 여성어를 연구하기 위한 하위범주로써 존재한다. 남성어가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여성어만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그 방식이다. 남성들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지만 여성들은 ‘여’중과 ‘여’고 그리고 ‘여’대를 다닌다. 학교라는 집단적 틀을 벗어나면 문제는 더욱 확대된다. 순수한 주체로써 개인으로 사회에 진입한 이들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호명된다. 남성은 자신의 이름으로 기자가 되고 사장이 되고 시인이 되지만, 여성은 ‘여’기자가 되고 ‘여’사장이 되고 ‘여류’시인이 된다.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어는 바르트가 (비록 부르주아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말하듯 “이름을 거부함으로써 그 기원을 잃어버리고 신화가 된다.” 신화는 역사적인 의도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정당화 하고 우연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둔갑시킴으로써 가부장제를 탈정치화 된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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