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기획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올해 대학 신입생들은 1987년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강연 같은 데서 그들을 만나면 감회가 있다. 그들이 태어난 해는 ‘민주화’의 원년이라 일컬어지는 해다. 그 해에 태어난 아이가 올해 대학생이 되었다. 말하자면 한국사회가 민주화한 지 20여년이 지났다.
알다시피 민주화란 민주주의화의 줄임말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란, 말 그대로 인민이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을 말한다.(인민이라는 말에 괜한 반감을 가질 건 없다. 인민이란 영어의 피플과 같은 말일 뿐이다. 한국에선 국민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건 국가의 성원이라는 말이니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라면 적당한 말은 아니다.) 하여튼 한국 사회가 민주화한 지 20년이 되었다. 한국에서 인민이 주인노릇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참혹은 무엇인가.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빈곤층을 비롯한 빈곤의 확대, 가장 충성스러운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시장개방과 공공영역의 사유화, 이어지는 민중의 삶의 파탄, 제국주의 침략전쟁 동조와 평택미군기지를 비롯한 반민중적인 국방외교정책... 무슨 놈의 인민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 조목조목 인민의 삶을 거스르는 것으로만 가득한가. 한국은 민주화한 게 맞는가.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정색을 하고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란 단지 자유롭게 투표하고 대통령을 욕할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말이다.

세상을 구분하는 방법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려면 세상이 어떻게 나누어지는지부터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세상을 나누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세로로 나누는 방법과 가로로 나누는 방법. 세로로 나누는 방법은 세상을 민족, 국가 따위로 나누는 것이다. 이 방법이 세상을 나누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월드컵 축구나 WBC 야구도 이 방법으로 나누어 벌어진다.
전통적으로 세상을 세로로 나누는 방법은 지배계급의 방법이다. 그들은 한 국가가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계급들 간에 온갖 불공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은폐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그래서 지배계급은 언제나 세상이 세로로만 나누어진다고 주장한다. 오늘 한국에서 난무하는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따위 계급을 통합한 구호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가로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세상을 세로로 나누는 기준이 민족이나 국가라면 가로로 나누는 기준은 계급이다. 세상이 민족이나 국가보다는 계급으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은 유별난 사회의식을 갖는 사람이 아니어도 누구든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한 국가의 성원들은 과연 같은 세상에서 사는가.
이를테면 이건희 씨와 한 비정규노동자는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고 똑같이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할 권리를 가지며 똑같은 축구팀을 응원하지만 과연 같은 세상에서 사는가. 미국에서 이건희에 해당하는 부자와 비정규 노동자를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둘이 똑같은 미국인이지만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산다. 그렇다면 이건희와 미국의 이건희, 혹은 한국의 한 비정규노동자와 미국의 한 비정규노동자는 어떤가. 그들은 국적도 다르고 생김새도 전혀 다르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은 오히려 같다.
결국 세상에 대한 견해나 태도는 세상을 세로로 나누려는 세력과 가로로 나누어보려는 세력 간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진보적인 태도나 견해란 민족이나 국가로 은폐된 세상을 애써 계급으로 나누어보려는, 그 실체를 보려는 노력에서 출발한다.
그런 노력의 가장 실제적인 방해물이 이른바 국익이다. 계급의 이해는 국가의 이해라는 좀 더 거대한 주장 앞에서 종종 왜소해지곤 한다. 국익이라는 구호는 한국처럼 세상을 계급으로 나누어보는 의식이 빈곤한 사회에서 특히 횡행한다. 그리고 국익의 환상은 다시 계급의식의 씨앗을 말려버린다. 군사 파시즘 시절이야 그 자체가 국가주의 세상이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민주화 이후, 특히 민주화의 후반작업으로서 개혁작업을 수행한다는 노무현 정권 이후 국익 선동이 늘어만 가고 있다는 건 참 암담한 일이다.
2002 월드컵 때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의 대한민국이라는 구호가 그 자체로 국가주의적이거나 파시즘적인 건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이른바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이 흥분했듯 어떤 진보적인 사회적 힘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도 전혀 아니었다. 그건 그저 제 나라 축구팀이 의외의 선전을 한 데서 나오는 아주 자연스런 열기였을 뿐이다. 말하자면 그건 그 규모나 외양과 무관하게 그저 ‘축구에 관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오늘 한국에서 울려대는 국가주의적 구호의 서막이 되었다. 독도 문제와 황우석 사건이 그렇게 이용되었다. 앞서 나열한 오늘 인민의 삶과 관련한 문제들은 언제나 그런 국익의 광풍 앞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외면한다. 비정규노동자가 분신하고 농민이 할복할 때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의 문제인 양 외면하는 것이다. 국익이란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이라는 것, 인민에게 필요한 건 국익이 아니라 계급의 이익이라는 생각이 확산되지 않으면 한국 사회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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