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듬살이

이 꼭지는 생활 속 언어를 통해 삶의 심층을 들여다 보기위해 마련되었다. 모듬살이는 사회생활이라는 뜻의 순 우리 말이다. <편집자주>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보고’, 집을 나와 학교로 갈 때 거리의 광고를 ‘본다’. 학교에 가면 책을 ‘보고’, 집에 오면 텔레비전을 ‘본다’. 남는 시간에는 컴퓨터를 ‘보고’, 친구를 만나 영화를 ‘본다’. 친구와의 ‘볼’일이 끝나면 “또 보자”라는 말과 함께 작별 인사를 한다. 우리의 일상은 ‘봄(seeing)’을 제외하고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위이며, 언어 습관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인간의 오감(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중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은 시각인 듯 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시각은 청각보다 중요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경험을 대표하는 최고의 권위를 부여받는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보는 것이 단순히 내가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물리적 요소를 향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 때 유행한 개그 중에 하나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남탕과 여탕이 벽 하나로 가로막혀 있는 목욕탕에 작은 구멍이 있다. 한 남자는 그 구멍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때 구멍을 통해 남자가 본 것은 바로 한 여자의 눈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보기도 하지만 보여지기도 한다. 본다는 것은 동시에 타인에게 보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고 보여지는 관계는 나와 타인의 관계를 역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내 삶의 주체는 ‘나’인듯 하지만 때로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나’의 의지가 바라는 것과는 다른 행위를 하기도 한다. 심지어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맞춰 내 몸의 특정 부위를 변형시키기까지 한다. 현대사회에서 본다는 행위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이미 본다는 행위는 나의 의지를 떠나 나의 외부에 있는 어떤 힘에 의해 일정한 방식으로 강제되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의식하는 일 없이 행해진다.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의 충만은 모든 것을 흡수한다. 청각을 사용한 통신수단인 핸드폰은 카메라가 없으면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시각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순수한 시간예술이었던 음악은 M-TV가 등장함에 따라 공간 속으로 빨려들어 시각에 포섭되었다. 이제 어떤 음악은 보지 않고는 들을 수 없다. 하지만 정말 시각은 그 엄청난 포섭력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을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친구와 헤어질 때 하는 말을 떠올려 보자. “잘 가, 또 보자”. 그렇게 헤어진 후 당신의 머리 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 친구는 ‘시각’ 장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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