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과 황사가 따뜻한 봄기운을 앗아간 날이 계속이다. 어쩌다 우연히도 한 번 나온 햇살이 지금이 봄임을 알려주는 어느 오후, 조계사 근처에 있는 대학생불교연합회(이하 대불련)에서 병역거부자 김도형씨를 만났다. 불교신자인 그는 병역거부 선언 전에도 비폭력의 말씀들을 마음에 새겨 반전평화운동을 했었지만, 그 때는 병역거부와 병역기피를 동일시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도 한국사회의 군사주의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전쟁은 나쁜 것이지만 나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군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던 김도형씨는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그 곳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괴로웠다. 이라크 전쟁은 그에게 진정한 비폭력 평화의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03년 4월 그는 “그 어떤 폭력에 참여도, 동의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총을 들 수 없다”는 마음을 먹고 훈련소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자신의 소신을 밝힌 그는 군 관계자로부터 입대하지 말 것을 요청받았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무기를 들지 않는 방식의 국가의무인 대체복무제도(사회봉사)를 요구”하며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그가 병역거부를 하던 03년에는 병역거부가 사회적으로 지금보다 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부모님은 물론이고 같이 평화운동을 하던 친구조차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었다”며 힘들었던 과거를 슬쩍 꺼내놨다. 병역거부를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질타와 시선 속에서 그가 가장 어렵고 힘들어 했던 것은 부모님과의 관계였다. 병역거부를 하고 미안한 마음에 집에도 못 들어가고 있던 그는 병역거부 사실을 부모님께 편지로 알렸다. 그러나 그가 편지를 보내기도 전에 병무청에서 집으로 그의 병역거부를 알리는 전화를 했고, 어머니는 몸져눕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부모님과 계속적인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평화에 대한 신념을 설득했다. 그는 부모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 과정에서 전에 몰랐던 부모님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부모님과의 솔직한 소통은 그가 병역거부를 통해 더욱 행복해 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김도형씨는 올해 1월에 1심 재판 후 구속되었다가 3월에 보석으로 석방되었고, 5월에 다시 항소심이 있을 예정이다. 그는 지금 항소심을 기다리며 대불련 간사로 환경 평화 운동을 하고 있다. 오랫동안 끌어온 군대 문제와 언제 옥살이를 해야 할지 모르는 그에게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일 것이다. 실제로 작년에는 그런 답답함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홀로 여행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병역거부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살아가기란 그리 녹록한 게 아니어서 지금까지의 삶 뿐 아니라 앞으로의 삶도 가난과 고민을 벗삼아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가난과 고민을 벗삼아 사는 것은 불행과는 거리가 먼 듯해 보였다. 그는 행복이란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한다. 그는 예전에 차비가 없어 갈 곳을 못 간적도 있었다고 토로하지만, 가난은 상대적 가치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삶이 운동의 연속이길 바라지만 생존이 전제되어야 하기에 “세상과 일정부분 타협해 나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는 힘든 길을 가려고 하지만 결코 어리숙한 이상주의자는 아닌 듯했다. 현실에 발을 딛고도 이상을 향해 자신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새로운 평화의 패러다임을 가진 자의 삶에 대한 상상력 덕분일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올 때 배웅을 해주는 그의 조용한 미소 속에 삶이 곧 평화가 되기 위해 살아온, 또 그렇게 살아갈 사람의 작은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허민호 편집위원  slnabro@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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