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넘어서

                                                                                                                            김동훈 / 서울대 미학과 강사
 
   공간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정의에 따르면, 공간은 연장을 가진 물체가 그 안에서 자리를 잡고 움직이는 속이 비어있는 삼차원의 물리적 실체이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빈 공간이 존재해야 원자들의 운동이 가능하다는 원자론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이렇게 빈 공간의 이념을 거부했던 것은 공간이 비어있다는 주장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었다. 빈 공간이라는 이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모순을 내포한다. 공간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공간도 생성과 소멸을 겪지만 다른 이들에게 공간은 고정 불변하는 실체이다. 전자의 견해를 대변하는 빅뱅 이론에 따르면 우주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으며 따라서 공간은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있다.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이긴 하지만 상대성이론에서 말하는 공간도 고정 불변하지 않고 시간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물체의 질량이나 속도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 반면 절대적으로 고정 불변하는 공간의 예로는 뉴턴이 제시한 절대공간의 이념을 들 수 있다. 이 중 어느 것이 공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까.

공간이란 무엇인가
  임마누엘 칸트는 이 문제에 대해 확정적 결론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물리적 공간의 무한성 여부나 빈 공간의 존재 여부, 공간의 생성겮恬轅?관한 물음은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궁극적 결론을 도출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대신 그는 공간을 시간과 더불어 선험적 직관의 형식으로 파악함으로써 문제에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이제 공간은 더 이상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 주관 내에 존재하는 선험적 직관의 형식이 되었다. 이러한 이론의 장점은 공간개념과 관련하여 철학자들을 괴롭혀왔던 위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공간은 우리가 외부의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형식일 뿐이지 물리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외부의 대상을 파악하는 형식이 꼭 칸트의 주장처럼 기하학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하여 공간개념을 존재론적으로 새롭게 정초하였다. 그에 따르면 본질적인 공간의 이념은 세계 내 존재인 인간 현존재가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는 여러 가지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공간을 삼차원의 물리적 실체로 파악하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은 이러한 여러 방식들 중 하나일 뿐이며 심지어는 부차적인 방식에 불과하다. 칸트가 제시한 공간개념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방법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다변화된 공간개념
  이렇게 해서 인간이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의 종류만큼 다양한 공간개념의 존재론적 기초가 마련되어 왔다. <궁정사회>를 통해 문화적겳せ瑛?공간의 한 예를 제시했던 노버트 엘리아스의 분석도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중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기존의 물리학적 공간개념을 당연시하고 다른 개념들은 예외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수단이라 생각하는데 지나치게 익숙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존의 공간개념도 실은 근대 자연과학을 통해 성립된 역사적 산물에 불과하다. 물론 근대 물리학의 공간개념이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하여 수정된 현대 물리학의 공간개념도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과 세계의 존재일반을 규정하는 틀이 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 공간은 물리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에 앞서 심리적, 문화적, 역사적, 정치적 공간이다. 이렇게 공간개념이 다변화된다고 해서 공간과 관련된 수많은 물음이 당장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 공간의 생성과 소멸, 빈 공간의 존재 등에 관한 물음은 아마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그렇지만 공간개념의 다변화를 통해 인간과 세계의 존재를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인류의 진보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이 생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