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호 [Code읽기] 타자/적, 상대적인 너무나 상대적인

안재석 / 영화학 석사

동시 다발적인 비행기 자살 테러가 자행되어 수천 명이 사망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너무나도 익숙하게 보아오던 바로 그 장면이었던 것이다. 급기야 모 매스컴에서는 몇몇 영화 장면과 실제 상황을 비교하면서, ‘현실’이 되어버린 ‘영화적 상상력’의 위험성을 흥미롭게(?) 각성시켜주기도 했다. ‘영화 같은 현실, 현실 같은 영화’. 이는 영화사 초기부터 제기되어온 문제이지만, 이미 헐리우드 영화제작인들의 상상력은 현실을 능가해오고 있었다. 특히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미국식 민주주의 전파의 선봉장 역할을 맡았던 헐리우드 영화는 ‘그럴듯한’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항상 ‘현실의 적’을 ‘악당’으로 삼았고, 이로 인해 대중의 오락거리로서의 영화는 ‘사실적인 재미’를 부여받아 왔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전쟁의 전범들이었던 나치 독일과 일본이 한동안 미국의, 그리고 헐리우드의 ‘적’이 되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오랫동안 숙적 관계에 있던 공산주의 소련과, 자유수호의 첨병으로서 기세등등하던 미국에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게 했던 베트콩이 영화에서도 ‘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사상과 체제의 대립은 너무나도 ‘영화적인’ 소재였고 그들은 당연히 ‘악당’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심지어 영화사 초기부터 심심찮게 그려진 SF 영화에서의 외계인 이미지가 이들 ‘현실의 적’이 가진 공격적 이미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 역시 단지 ‘상상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냉전 체제의 붕괴 후, 미국과 헐리우드는 더 이상 싸울 상대를 잃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적’들을 찾아야 했다. 특히 그 동안 수많은 영화를 통해 ‘영화는 곧 선(민주주의)과 악(공산주의)의 대결’이라는 구도를 확립시켜왔던 헐리우드로서 이는 너무나도 절실한 것이었는데, 결국 그들은 내부의 적들, 즉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 등장한 바 있던 ‘전쟁광’이나, 마피아를 비롯한 야쿠자, 삼합회 같은 외국계 범죄조직들, 그리고 냉전 체제가 구축해놓았던 공격 성향의 외계인들을 새로운 ‘적’으로 삼기에 이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근 헐리우드 영화의 단골 ‘악당’은 바로 극단적인 반미 감정을 가진 테러리스트들이었다. 1997년 국내에서 개봉한 <에어포스 원>은 구 소련의 부활을 꿈꾸는 테러리스트들을 세계 평화를 해치는 ‘악의 화신’으로, 이를 격퇴하는 미국은 ‘정의의 수호자’로 묘사하는 헐리우드 영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특히 이번 미국 대참사의 주범으로 알려지고 있는 아랍계 테러리스트들은 이미 수많은 영화들(<비상계엄>, <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에서 미국의, 그리고 헐리우드의 ‘적’으로 그려졌다. 1993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지하주차장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와, 1998년 200명이 넘는 인명이 살해되고 5,000여 명이 부상한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 대사관 폭탄 테러로 미국의 ‘이슬람 공포(Islamphobia)’는 극에 달했고, 이러한 공포가 새로운 ‘적’을 찾고 있던 헐리우드 영화에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사실 ‘적’, 또는 ‘타자’의 개념은 상대적인 것이다. 1964년 이스라엘에 대항해 팔레스타인 국가 건국을 위한 조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창설, 수많은 테러를 주도한 야세르 아라파트는 한때 ‘테러리스트의 수괴’로 낙인찍혔지만, 그런 그에게 서방은 1994년 노벨 평화상을 헌정했다. 이스라엘과 미국 등이 ‘국제적인 정의를 유린하는 악당’이라고 규정했던 그가 실제로는 팔레스타인의 ‘영웅’이었음을 국제적으로 인정하게 된 셈이다. 현실이 이럴진대, 대중의 오락거리인 영화에서의 ‘적’ 개념은 오죽할까. 결국 그들의 ‘영화적 상상력’이 ‘현실’이 되고 만 것은 사실이지만, 전세계의, 특히 미국의 국민들이 이번 참사에 경악했던 것이 단지 이러한 사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항상 그들이 믿어왔던 자유 민주주의의 승리와 ‘정의의 수호자’로서의

영웅담이 실제로는 영화에서나 가능한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받게 된 허탈감은 아니었을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감독인 마이클 피기스는 한 인터뷰를 통해, “그들(헐리우드 영화제작인들)이 만든 폭력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가를 깨닫게 된 헐리우드 영화는 변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 헐리우드 영화계는 변화할 것인가. 헐리우드가 이 ‘영화 같은 현실’에 얼마나 기발한 상상력을 가미하게 될지, 그리고 자신들의 보복 공격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현실 같은 영화’가 만들어질지. 항상 그래왔듯이, 그것은 너무나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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