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봉 / 문학평론가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음악 듣는 일을 좋아했다. 한적한 시골 마을의 외딴집에서 자라난 어린 시절의 내 앞에서 세상은 너무 조용하면서 심심한 장소였다. 그런 정적 가운데서 아침을 깨우는 새소리로부터 대밭을 쓸고 가는 대낮의 바람소리와 긴 겨울밤의 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울음소리에 이르기까지 나는 세상의 존재를 ‘소리로 듣게 되었다’고 말해야 하리라. 그러니까 소리에 민감했던 내 어린 영혼은 음악의 세계를 향해 저절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로부터 나는 온갖 종류의 음악을 듣기 시작한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처음 들었던 음악은 고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트로트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 청춘의 시간을 압도하기 시작한 음악의 시대는 온갖 종류의 음악 장르 사이를 방황하는 기나긴 순례의 여정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 여정의 끝자락에서 마주 친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Tous les matins du monde, 1991)’의 OST는 음악에 대한 나의 순수한 몰입과 탐닉이 빚어낸 경이로운 추억의 한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세상의 모든 아침’과 나의 만남은 십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는 기억 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박사과정에 입학한 삼십대 초반의 어수룩한 사내였던 나는 학문과 삶이라는 미지의 숲을 앞에 두고 미아처럼 떠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시내의 한 음반 가게에서 우연히 ‘세상의 모든 아침’을 발견했고 그 CD 한 장은 단숨에 나를 압도해 버렸다. 음악과 함께 나는 곧바로 비디오를 입수하여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 순간, 나는 내 앞에서 그 소리의 세계가 자신의 육체를 갖춘 하나의 우주로 다시 태어나는 황홀한 순간을 경험하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아침’에 등장하는 음악은 17세기 중반의 프랑스 음악가 쌩트 꼴롱브와 마랭 마레의 곡들이었다. 파스칼 끼냐르의 원작 소설에 바탕을 둔 영화는 세상과 절연한 채 혼자 살아가는 콜롱브와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되는 마레를 중심으로 예술과 삶, 인간과 사랑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의 서막을 여는 ‘터키인들의 예식을 위한 행진곡’에서 울려 퍼지는 둔중한 북소리는 앞으로 펼쳐질 운명적인 세계의 예고에 다름 아니었다. 거기서 지금은 죽고 없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만 연주하는 꼴롱브의 무시무시한 집념과 고독이, 출세를 꿈꾸는 마레의 야망과 배신 그리고 회심의 과정이 그들이 추구하는 음악을 둘러싸고 펼쳐진다. 그 이야기 가운데서 꼴롱브와 마레가 연주하는 중세 시대의 현악기 ‘비올’의 소리는 내 영혼을 거의 질식시켰다고 고백해야 하리라.
영화의 끝에서 스승 꼴롱브는 철없는 제자 마레에게 대답한다. 진짜 음악이란 단지 ‘지친 자를 위한 휴식’일 뿐이라고. 꼴롱브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아침’에 담긴 비올 소리는 그 시절의 나에게 유일한 ‘위안’이면서 ‘휴식’을 선물했고, 지금도 그 감동은 언제든지 생생한 기억으로 되살아나 식어버린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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