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영혼의 동반자.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공간, 음악 또는 책, 영화 등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soul mate에 대해 살며시 들추어 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이승하 /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고흐의 그림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뭉크의 그림을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뭉크의 ‘병든 아이’라는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설움과 슬픔이 가슴을 데우고, 시야가 흐려진다. 석판화와 유화가 다른데 유화 ‘병든 아이’는 침대에 앉은 자세로 있는 아이 옆에 한 여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여인은 아이가 죽을 운명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뭉크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 후 동생 라우나가, 열네 살에는 식구 중 가장 좋아했던 누나 소피에가 같은 병으로 죽어 그는 폐질환에 대한 공포 속에서 내성적이고 감수성 예민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뭉크는 어렸을 때 기관지염으로 세 번 입원해야 했으며 2남 3녀 중 나머지 두 명도 일찍 죽었다. 스스로 “내 일생은 건강과의 싸움이었습니다”라고 회고한 적이 있는데, 성장기의 이런 경험은 평생 지워지지 않아 비극적인 제재를 반복해서 그렸을 것이다.
뭉크는 고통·죽음·불안 등을 테마로 그림을 그렸기에 내면세계가 지극히 어두웠음을 알 수 있다. 흡혈귀가 사람의 목에 이빨을 박고 있고 해골을 껴안고 있는 소녀가 나온다.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의 그림은 음습하다. 뭉크의 그림을 응시하고 있으면 가슴이 그야말로 뭉크-ㄹ해진다.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고, 소리 죽인 울음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 신음소리와 소리 죽인 울음이 끝내 터져 나오는 자리에 ‘절규’가 있다.
대학 3학년 때 ‘서양미술사’ 과목을 들었다. 수업이 하루는 교수님 강의였고, 하루는 그림 감상이었다. 교수님은 슬라이드를 보여주면서 설명하셨는데 유파별로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었다. 내게 가장 강한 인상을 준 화가가 노르웨이의 뭉크였다. 뭉크는 나로 하여금 시 ‘화가 뭉크와 함께’를 쓰게 했다. 이것이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 되었고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실렸다. 뭉크한테 큰 빚을 진 것이다.
그 뒤에 더 많은 빚을 졌다. 타인에게 치이고 세상살이에 지쳐 한없이 서러워질 때면 뭉크의 화집을 뒤적인다. 고통의 끝간데에서 불멸의 예술혼을 꽃피운 뭉크를 생각하며 나는 또 새삼 기운을 얻는다. 그는 정신병원에 8개월 동안 입원한 적이 있을 정도로 심신이 약한 사람이었지만 의외로 강한 정신력과 조국애를 갖고 있었다. 나치스가 노르웨이를 점령한 뒤 ‘미술명예평의회’라는 어용단체에 가입하도록 압력을 넣었지만 그는 이를 끝내 거부했다. 나치스가 그의 그림에 퇴폐예술이라는 낙인을 찍고 82점을 몰수한 다음 이런 압력을 넣었음에도 단호히 거부한 용기있는 예술가가 뭉크였다.
“내가 그리는 것은 숨을 쉬고, 느끼고, 괴로워하고, 사랑하며, 살아 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나는 결혼을 안 했다. 나의 유일한 자식은 그림이다.” 뭉크의 이 말이 나를 나태의 늪에서 건져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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