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호 [문화바람] 에쓰노그라피로 말 걸기 ① 기지촌, <나와 부엉이>, 그리고 에쓰노그라피

다큐멘터리와 에쓰노그라피의 관계 맺기

 


문화연구의 새로운 질적 방법론으로 부상하고 있는 에쓰노그라피를 소개하기 위해, 1년간 기지촌에서 생활하면서 성매매 여성들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나와 부엉이>를 제작한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또 성매매 근절을 위한 운동의 현황을 살펴보고, 성매매를 그만둔 여성들이 이후에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현장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방안과 정책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차례 

1.기지촌, <나와 부엉이>, 그리고 에쓰노그라피
2.성매매 방지와 살 권리



박경태 / 다큐멘터리 <나와 부엉이> 감독ㆍ동국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다큐멘터리와 에쓰노그라피(Ethno-graphy)에서 대상과 ‘관계 맺기’는 탐색과 묘사, 설명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관계 맺기’는 낯선 자아와의 소통 과정이며, 현장을 이해하는 방식을 제공한다. 관계 맺기는 다큐멘터리와 에쓰노그라피 작업을 하기 위한 출발점이면서, 자료를 생산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다큐멘터리와 에쓰노그라피가 이 ‘관계 맺기’를 통해 작업 가능하다는 점은 두 작업이 서로 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하지만 섣불리 다큐멘터리와 에쓰노그라피가 동일한 것으로 볼 순 없다. 마찬가지로 이 둘의 차이가 문자 언어와 영상 언어의 차이라고만 설명하기도 석연치 않다.


여기에 직접 체험이 아닌 문자, 또는 영상만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관계 맺기’의 비밀이 들어 있다. 물론 ‘관계 맺기’는 현장 참여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특수한 경험은 아니며 일상생활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다만 목적과 의도를 느끼지 못한 채 성격, 습관, 취향으로 이해될 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누구나 자신의 성격, 습관, 취향에 대해서 느끼고는 있지만 언제부터,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천성이 그래서, 원래 좋아서’가 이 질문에 대한 최선의 대답일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현재 일상은 다큐멘터리나 에쓰노그라피의 자료로 쓰이진 않는다. 아무튼 수많은 이야기와 사건 중에 ‘무엇이 자료가 될 것인갗의 질문은 일상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답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의 생활은 보지 않으면서 특수한 공간의 특이한 사람만 자료로 삼는다면, 일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특이한 사건들만 집어내는 소재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일상적으로 보이는 수다와 행동, 습관들이 관찰자가 보고자 하는 현장의 중요한 맥락을 제시해 줄 수 있다. 만약 관찰자가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본다면, 예컨대 피해자로서 증언만 생각한다면 이러한 일상적인 모습은 스쳐 지나갈 뿐 자료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일상의 언어는 현장에서 오랫동안 생산된 언어이며, 삶의 방식이기에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 즉 대상과 ‘관계 맺기’의 첫 번째 과정은 현장의 일상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현장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다.


“언제 미국에 가셨어요.” “박정희 각하가 대통령 할 적에.” 그러면 “언제 나오셨어요.” “응. 대머리가 대통령 할 적에.” 다큐멘터리 <나와 부엉이> 중 주인공 인순이 아줌마와의 대화 장면이다. 관객들은 이 장면에서 박장대소를 하게 된다. 전두환을 싫어하는 관객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여기서 숨은 맥락을 찾아내야 한다. 바로 기지촌이 군사정권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사회구조적인 측면, 역사적인 맥락은 주인공의 특이한 기억기술 과정에서 드러난다. 만약 일상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이 장면은 단순히 웃긴 장면으로만 보일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일상언어를 처리하는 방식에서 에쓰노그라피와 구분된다. 에쓰노그라피 작업에서는 인순이 아줌마의 말을 치밀하게 ‘기억’의 맥락에서 집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는 단지 느낌과 분위기를 극적으로 소개해줄 뿐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는다. 물론 내레이션을 통해 적극적으로 설명할 순 있지만, 내레이션은 영상의 느낌을 가로막고 관객들에게 고정된 시선을 제공하는 한계를 가진다. 즉 다큐멘터리는 탐색과 묘사에서 에쓰노그라피와 비슷하지만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서는 한계를 보인다. 극적인 구성을 강조하는 다큐멘터리는 어쩔 수 없이 문자로 재현된 현장보고서의 기본적인 자료에 의존하게 되며 충분한 설명과 자료는 사라진다. 때로는 현장의 총체적인 지도를 그리기 위한 에쓰노그라피의 자료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문자로 된 에쓰노그라피는 객관적인 자료와 현장에 대한 총체적인 지도를 그리지만 실제 존재하는 사람들의 일상은 다가오지 않는다. 현장의 느낌은 읽는 사람의 주관적인 경험 속에서 재구성될 뿐이다. 표정과 습관이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대상에 대한 이해의 폭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기억 구술작업에서 구술 원고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재현하는 시도가 있긴 하지만 대상과 관객이 직면하는 다큐멘터리만큼 강하진 않다.


끝으로, 다큐멘터리와 에쓰노그라피는 현장의 대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바로 카메라가 중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단지 에쓰노그라피의 수동적인 기록 도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대화 방식, 관계 맺기의 방식을 새롭게 개발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에쓰노그라피가 현장의 힘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비주얼한 것의 도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며,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며 쌓아가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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