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호 [상반기 문화정리] 추억 그리고 과거로의 회귀 혹은 그리운 것들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이상용 / 영화평론가

몇 일 전 회갑 잔치를 다녀왔다. 친구 녀석의 아버님이 주인공이었다. 대부분 나이 지극한 손님이었지만 일부러 나를 부른 것은 아들 쪽에서도 축하송을 부를 만한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뒤풀이 장소에 끌려가 들은 뜻밖의 제안에 당황해 하며 우물쭈물거리고 있었는데 친구 녀석이 먼저 마이크를 잡고 일어섰다. 그가 부른 곡은 낭만에 대하여였다. 최신곡만 상대하던 녀석이 갑자기 낭만에 대하여를 부르자 당황스러웠다. 사람들은 흥겨이 그의 노래를 쫓고 있었다. 문득 그가 선택한 노래와 그것을 쫓는 사람들 사이에 세대를 넘어서는 어떤 힘이 존재하는 것인지 궁금해 졌다.  

돌이켜 보면 대학 초년 시절 합창으로 목놓아 부르던 노래 중에는 소양강 처녀가 빠지지 않았다. 지금도 비슷할 것이다. 설마 서태지의 난 알아요나 JTL의 노래를 합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낭만에 대하여와 같은 곡들은 세대를 거스르는 어떤 문화적 아우라가 있는 것은 아닐까. 소양강 처녀는 예나 지금이나 대중들에게는 시대를 초월해 처녀로 각인되는 존재가 아닐까. 패션의 복고풍도 마구잡이가 아니다. 그 속에는 선호되는 패턴이 있고, 공통된 경향이 있다. 물리학의 카오스 이론이 혼돈이 아니라 혼돈 속에 질서가 있음을 밝혀내 듯이 문화적 복고 현상이라고 불리는 이 속에는 어떤 공통적인 분모가 도사리고 있다.

문화적 복고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단지 어떠한 일시적인 유행이나 힘에 의해 그것이 복고풍이라는 말로 두드러지게 각인되는 시기가 있기는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과거를 그리워하던 때는 있기 마련이다. 발터 벤야민이 19세기의 수도 파리를 탐구한 <파사쥬>에서도 드러나듯이 바로크적인 감수성이 19세기의 파리를 지배하던 시절도 있었다. 문제는 어째서 바로크인가 하는 것이다.  

영화의 복고풍
19세기 파리에서 유행한 바로크는 과거의 바로크가 아니다. 그것은 19세기에 맞게 각색된 바로크이다. 문제는 바로크적인 것이다. 최근 대중 문화의 영역에서 등장하는 80년대풍 역시 요즘 시대에 맞게 각색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드라마 <여고시절>, <해피투게더>의 교복은 올드한 것이지만 동시에 패션(패션이라는 말에는 동시대적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최근 영화판에서 복고를 이끄는 이들은 젊은 감독들이다. 이창동의 <박하사탕>식의 이야기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과거로 돌아가 보자는 이유가 무엇일까.

<묻지마, 패밀리>에 등장하는 세 편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내나이키>는 관객들을 넉넉하지 못했던 어려운 시절로 이끌고 간다. 그때 그 시절 까까머리 중학생 소년에게 나이키 상표가 새겨진 신발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영화는 오늘날과 같은 소비사회로 진입하기 이전의(그래서 순수한) 시대를, 한 소년과 소년의 가족을 통해 회고한다. 그들의 삶은 가난하고 비루하지만 동시에 아름답다. 가난하고 비루한 것이 상처가 아니라 낭만이나 향수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80년대 달동네를 배경으로 삼는다. 달동네 사람들은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우정과 순수함이 넘쳐 난다. 똥을 대신 퍼담는 친구들, 과거의 사랑을 찾아 헤매는 늙은 댄서 등 모두가 80년대식 낭만에 취해있다.

TV 드라마이건 영화이건 과거를 통해 향유하는 것은 공동체의 아우라이다. 회갑 잔치에서 친구 녀석이 부른 노래 가락과 가사 역시 공동체의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복고는 그런 점에서 사라져 가는 것의 애송이며, 개인화되고 물질화된 사회에 저항하는 기표라고 할 수 있다. 술자리에서 트롯트를 합창하는 것은 과거 김민기의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셨던 세대들과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비판의 여지도 크다. 영화를 통해 과거의 향수를 만끽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최근 개봉작을 보면 무비판적으로 과거를 미화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가 든다. 이러한 현상은 후기 산업 사회의 문화현상과 상통한다. 포스트 모던 문화의 특성인 노스텔지어의 집착은 현재 속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후기산업시대의 재현 방식이다. 나아가 이러한 방식은 리메이크나 패러디 문화를 양산하게 되는데, <미워도 다시 한번 2002>, <재밌는 영화> 등이 창조성보다 적당한 문화의 재탕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세대론의 문제
젊은 감독들이나 최근 문화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은 주로 70년대 초반생들이다. 이들은 80년대에 유년 시절을 겪은 세대들인데, 80년대로의 회귀 현상은 자신의 정체성을 문제로 삼는 독립, 단편 영화의 흐름 속에서도 뚜렷하다. <짧은 여행의 기록>이나 은 광주를 등장시키는 사회적인 영화이다. <짧은 여행의 기록>의 주인공은 망월동에 당도하지만 끝내 버스에서 졸다 지나치고 만다. 카메라는 주인공을 대신해 망월동을 헤맨다. 은 유년으로 돌아가 80년대 광주를 경험한다. 현재와 과거라는 시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광주를 제대로 호출해 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광주를 호명해야겠다는 부채 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만 동시에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는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다른 코드의 영화이지만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김동원 감독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달동네의 아름다운 순정을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루함에도 집중해야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단지 그가 80년대를 선택한 것은 지금의 문화가 재미 없기 때문이다. 그 말은 지금의 문화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고, 80년대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으로 들린다. 우리 사회가 지닌 80년대 콤플렉스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복고풍의 내면은 복잡하다.

복고풍은 아니지만 <오버 더 레인보우>의 90년대 풍경도 기묘하다. 기억을 상실한 주인공의 과거를 쫓아 90년대의 한 사진 동아리를 훔쳐보면, 정작 90년대라고 할만한 특징은 찾아 볼 수 없다. 동아리 풍경이나 파티장면은 2000년대 동아리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어째서 90년대의 특징을 지워버린 것일까. 90년대 초 한창이었던 학생운동이나 사회 문제를 집어넣는 것도 진부한 클리쉐(장식)일 수 있지만 기억을 다루는 영화가 배경을 지워버렸다는 것은 흥미로운 역설이다. <오버 더 레인보우>는 드라마의 보편성을 찾아 헤매면서 역사나 시간의 특수성은 찾지 않는다. 어쨌거나 무지개를 쫓는 것은 젊은 영화의 스타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무지개는 태양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 무지개가 사라진 뒤 드러나는 것이야말로 태양 아래 노출된 현실이다. 젊은 감독들에게 필요한 것은 태양을 바라볼 인내심이 아닐까. 어쩌면 요즘 같은 더위에 그것은 너무 가혹한 당부의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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