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호 [문화기획] 동아시아 문화의 시대 -② ‘아시아 영화’의 가능성
국가단위의 영화 이해하기 위해 초국적의 흐름 찾아야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소위 국민 국가(nation-state)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이 역시 ‘동아시아’에 위치한 한국의 극장이나 부산 영화제 그리고 비디오 시장 등으로 건너와 한국의 관객들에게 보여질 때 그 영화들은 이미 그들의 기원지인 각국의 경계 너머인 초국적(transnational)의 공간에서 글로벌하게 유통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들 영화들은 동아시아라는 지정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있는 일상과 환상을 다루고 또 일본이나 중국 배우들이 나와 자국의 언어를 사용하고 장 이모나 첸 카이거 그리고 기따노 타게시 와같은 중국와 일본의 대표적 감독의 이름으로 서명되어 있다. 그러나 그 작품들이 우리를 내방할 때 그것은 이미 북경발 또는 동경발 서울행이 아니라 칸느나 베를린 그리고 베니스, 뉴욕과 같은 서구로의 여행을 마친 이후이다.
이러한 국제 영화제의 경쟁부분의 내부규약은 대부분 그 영화제에서 세계 초연을 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동아시아 각국의 국가 영화는 초국가적 인준을 받은 이후에야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도착한다. 영화제가 아니라면 이들 영화들은 미라맥스나 소니 클래식의 글로벌한 배급망을 타고 이곳에 흘러든다. 동아시아의 어느 국가도 이 영화들에 대한 지역적 선점권을 갖고 있지 않다.

국적불명 혹은 초국적 영화
그렇다면 동아시아 영화라는 단위적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유교적 자본주의 체제의 문화 생산물이라든가 식민지 근대화의 경험이 재현되어 있다든가 아니면 봉건적 속박과 근대적 요구 속에서 분열된 여성성의 문제 등과 같은 비교적 잘 알려진 행로를 피해 가장 최근의 현상으로부터 그 질문이 함의하는 기미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뮬란>과 <알렉산더>로부터 다시 위 질문을 시작하자. 최근 한국에서도 개봉된 <뮬란>은 디즈니에서 만든 중국의 용맹한 소녀 뮬란의 이야기. 현재 제작이 진행 중인 <알렉산더>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이 공동투자하는 헬레니즘문명의 영웅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애니메이션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틀 ‘동아시아 영화 담론’으로 다시 이야기하자면 <뮬란>은 ‘동아시아’, 중국에서 소재를 취해 서구 자본과 기술로 만든 영화이며, <알렉산더>는 서구 문명의 기원에서 소재를 취하지만, ‘동아시아’의 두나라와 미국의 자본과 기술로 만들어지고 있다. 디즈니가 <백설공주>나 계속 만들고 한국이 <블루시걸>류나 광개토왕의 전설적 기상에 대한 애니메이션에 대해 만든다고 한다면 한 국가의 영화와 그 국가의 공적 정체성과의 관계는 비교적 산뜻하게 정의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로벌한 자본의 이동과 관객의 대규모 국제화는 이제 한 영화의 기획 단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고, 세계시장을 향한 야심은 국민-국가 단위의 이해를 넘어서는 초국적 단위의 영화 상품을 기획, 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국적 불명’의 영화라는 평가는 부정적인 것이 었지만 앞으로의 사정은 다를 것 같다. 국적 불명은 초국적인 문화 상품에 대한 야심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제 영화가 생산되는 공간의 지리적 특성이 영화의 이른바 국가적 정체성-이른바 한국적, 프랑스적 혹은 중국적 정체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던 시기는 지나가고 있다. 여기에다 이산민들이 만들어내는 영화들은 ‘동아시아 영화 담론’의 경계를 예측불가능하리 만큼 확장되고 있다. 홍콩의 웨인 왕의 ‘조이럭 클럽’ 그리고 대만의 앙리의 ‘결혼 피로연’과 같은 영화는 이민을 떠난 중국 이산민들의 삶과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묻는다. 이후 앙리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에마 톰슨이 각색한 ‘센스 앤 센서빌리티’를 만들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 대만/중국인인 그 자신이 아마도 동시대의 많은 영국 사람들보다 제인 오스틴의 세계를 더 친근하게 느낄 것이라고. 예컨데, 대만/중국인로서의 자신의 감각과 감수성이 제인 오스틴을 더 잘 해석해낼 수 있을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 근대소설의 고전을 우회해 대만의 현재를 이야기한다는 이러한 패러독스는 앞으로도 동아시아계 이산민 감독들의 영화적 특성이 될지도 모르겠다.


‘문화적 중국’과 중화주의
홍콩의 존우와 잭키 챈의 헐리우드 스토리는 동아시아 단위의 영화 연구의 지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헐리우드로 건너가기 전에도 이미 존우와 잭키 챈의 영화는 사실 ‘국제적’이었다. 동남 아시아와 미국 극장에서 개봉되었을 뿐만 아니라 쿠엔틴 타란티노라든지 로버트 로드리게즈와 같은 감독들은 존우의 영화적 코드를 모방하고 있었다.
앙리의 패러독스와는 대조적으로 잭키 챈이 헐리우드에서 만든 영화는 오히려 그 초국가주의적 특성이 문화적 개성 표현을 요구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예외없이 중국 쿵푸 영화의 영웅으로 위치시킨다(쉘든 시아오 펭 루- 중국영화 비평가의 지적).

이러한 맥락에서 펭루는 중국-미국 영화들을 초국가적 중국 문화의 부상을 가리키는 지표로 읽는다. 그러면서 뚜 웨이 밍과 같은 학자가 “문화적 중국`:`중심으로서의 변방”이라는 논문에서 사용했던 ‘문화적 중국’이란 개념을 환기시킨다. 문화적 중국은 중국 본토와 대만 그리고 홍콩을 그 첫 번째 ‘상징적 우주’로 해외의 중국인들을 두 번째로 그리고 중국문제에 관심을 가진 비중국인들을 세 번째로 배열한다. 이때 중국과의 동일화는 법적 혹은 영토에 대한 고려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제휴의 문제가 된다. ‘문화적 중국’이니 ‘대중국’, 혹은 ‘대중국 경제 지대’나 ‘동아시아 근대성’과 같은 개념들은 한편으로는 중화주의적 야심을 또 한편으로는 유럽-미국의 지배에 대한 반헤게모니적 담론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화주의라는 혐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문화적 중국’이나 ‘대동아공영’의 악령을 채 떼어내지 못한 일본의 아시아주의, 이 사이에 아직 ‘동아시아 영화’의 중요한 부분인 북한 영화에 대한 접근은 물론 한국이라는 국민 국가의 형성과 영화와의 긴밀한 관계를 탐색한 연구서 한권도 제대로 없는 한국 영화가 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저술들이 그러한 맥락에서 쓰여진 책들이다 (‘인도대중영화의 국민적 정체성’, ‘아프리카 영화’, ‘이탈리아 국민 영화’, ‘깃발 흔들기: 영국에서 국민 영화를 구성하기’).

국가 단위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초국적의 흐름을 동시에 잡아내야 하는 시기. 이 부분에 관해선 중국 관계 영화학자들의 발걸음이 가장 빠른 것 같다. 영화제의 쇼케이스를 통해 ‘아시아 영화의 창’이라는 소박한 역할을 맡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시아 영화의 창틀을 짜는 제조공들과 그를 운반하고 판매하는 대행자들에 대한 정치경제학적인 분석 그리고 그와 관계된 텍스트 담론에 대한 정치적 분석이 영화 연구와 시각문화 연구의 영역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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