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호 [시사포커스] '금 모으기 운동', 어떻게 볼 것인가
2003-04-04 13:38 | VIEW : 31
 
105호 [시사포커스] '금 모으기 운동', 어떻게 볼 것인가

호한용 / 편집위원


‘금 모으기 운동’을 둘러싸고 대학원생들 사이에서 흥미로운 논쟁이 오가고 있다. 파시즘의 한 형태라거나 집단 정신병적 현상으로 봐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이에 대해 이기주의적 발상이라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영화 ‘타이타닉’을 볼 것이냐 말 것이냐에 이르면 논쟁은 불꽃을 튀기기에 이른다. 대체 뭐가 문제인가. 이는 ‘금 모으기 운동’과 관련, 우리 사회 성격의 일단을 살펴봄으로써 윤곽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받고 있는 교육의 내용이라든가 지향점은 분명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모델을 따르고 있다. 개인의 존엄성이라든가 자유의 보장이 이를 포장하고 있다. 송두율 교수는 이러한 맥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미국적 ‘근(현)대’가 지닌 힘은 바로 그의 정치, 경제, 군사력에 의한 패권에서 나타났고, 전후 세계의 냉전 체제의 최전선인 한반도는 따라서 그러한 힘이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된 곳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근(현)대의 가장 모범적인 모습이 바로 미국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은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러한 미국은 ‘아니오’라는 말을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대상이었다.”(<우리에게 근(현)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지만, 지식의 차원을 떠나 실생활의 양상을 보면 일본과 상황이 비슷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살인적인 입시지옥이라든가, 문제 많은 여성의 지위, 비좁은 주거 환경, 불충분한 사회복지 수준, 국가주의로부터 유래하는 정치 문화의 폐해 등은 대표적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송교수의 지적은 유의미하게 다가서기만 한다.

파시즘의 징조인가 전통의 지류인가

“개체와 개체 의식, 또는 주체와 주체 의식을 해체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이들을 강화시키는 일이 일본적 근(현)대의 과제로서 계속 남아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종종 ‘제2의 일본’이라 불리는 한국적 ‘근(현)대’의 구성도 비슷한 과제를 안고 있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서구의 근(현)대에 주목한다면 ‘서구화=근대화’를 먼저 진행시킨 일본의 경우가 기준이 될 수도 있다. 또한 ‘동아시아론’을 둘러싼 문화적인 배경에 주목할 필요성도 있을 듯 하다. 하지만 이와 관계 없이 우리 역사 나름의 ‘공동체 문화’를 살펴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서구가 ‘시민 사회’ 영역을 얘기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우리 나름의 사회 영역의 특징을 대등하게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는 명제에 따른다면, 조선 시대 지배 체제의 문자가 ‘한자’라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한자’는 언어의 도구적 기능에 충실하기보다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기능한 바 크다. 그 자체로 세계를 분류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예술적이며 철학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본질을 지향하는 시의 세계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시’의 세계란 무엇인가. 차이를 가로지르며 하나의 공통점으로 표출되는 은유의 정신이 우위인 세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차이를 꿰뚫는 원리에의 집착이 정점을 이룰 것이다. “한 사람을 ‘한 명’, ‘한 분’으로 지칭한다. 이때 사용된 명과 분은 개체가 갖고 있는 부분자적 관계의 명칭과 분수로 개체의 본질과 동일시되어 있다. 이처럼 유학자들은 사람을 철저하게 명분이라는 부분자적 관계로 파악하였다”(<조선시대 유교 문화>)라는 최봉영 항공대 교수의 지적이 흥미로운 것도 이 때문이다. 통체 중심의 사고가 현재의 ‘공동체 문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의 마누라’가 ‘우리 마누라’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학자들이 이를 바탕으로 삶의 당위를 찾는 데 주의를 기울인 반면, 기층 민중들은 당위가 삶으로 실천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에 관심을 드러내었다. 갈등이 주가 되는 문학 양식이 ‘소설’인 바, 조선 후기 때 이미 소설의 유통망이 형성되어 민중들에게 읽힌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선 시대의 소설은 정한이라는 측면에서 의리의 실현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이 정한의 형태로 표출되어 있다”라고 지적하며 최교수는 그 특징을 살펴 나간다.

“소설의 주인공은 의리를 실현하는 데 출중한 능력을 가진 인물, 즉 효자·충신·열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소설의 줄거리는 의리를 실천하는 데 투철한 주인공이 의리의 실천을 방해하는 각종 장애물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어 나가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인간관계로 나타날 때에는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이 갈등하는 가운데 선한 인물이 악한 인물을 누르고 승리하는 권선징악의 형태로, 사물과의 관계로 나타날 때에는 인간의 지극한 정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열악한 환경이 행복한 환경으로 바뀌는 천우신조의 형태로 나타난다.”

역사성은 땅 밑을 흐르는 지하수와도 같아서 언제 어느 곳에서건 샘물처럼 솟아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근대성’의 흐름 역시 물의 흐름처럼 다양한 지류를 갖고 있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나름의 근대성을 모색할 단초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사회의 불안한 분위기가 파시즘을 불러올 가능성이 많다는 점은 조심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총장이 판공비를 줄여 극빈 학생을 돕기로 한 것을 비롯, 학부 후배들이 자신의 장학금의 일부를 반납해 이에 동참하고 있다고 한다. 파시즘의 여파인가 전통의 흐름의 표출인가. 아무튼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현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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