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호 [사회비평] 불안한 사회의 심리학
2003-04-04 13:38 | VIEW : 25
 
105호 [사회비평]  불안한 사회의 심리학

무엇이 독재자의 망령을 불러내는가

이장주 / 심리학 석사4차


며칠 전 ‘PD수첩’에서는 가족동반 자살을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경제침체로 인한 실업 및 부도를 이유로 가족 단위의 자살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자살의 양상이 가족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어린 아이들이야 무슨 죄야”라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오지만, 그러한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이 의아할 수 있다. 서구의 경우, 자살의 단위가 개인이란 점과 비교하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한국과 서구의 이런 차이를 ‘자아(self)의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설명하는 견해가 있다. 서구에서는 ‘독립적 자아’를 지향, 독립성·자율성·독특성을 강조하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타인과의 조화를 중시하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아의 평가를 중시하는 ‘의존적 자아’가 기준이 된다. 결국 ‘나’의 문제는 나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통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특히 ‘의존적 자아’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본적인 ‘우리’ 단위가 가족이란 점을 살펴볼 때, 일가족 동반자살의 개연성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라는 비난이 있는가 하면, 어린 자식과 부인을 남겨둔 채 자살을 했을 경우, “세상에 어린 자식과 부인은 어쩌고 자기만 가느냐”라는 비난이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어쨌든 죽기도 힘든 세상인가 보다.


가족동반 자살과 의존적 자아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살펴보면, 그 기저에는 항상 ‘불안’, ‘우울’ 등의 단어들이 놓여 있다. 불안은 미래에 자신의 환경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예측불가능에서 출발한다. 이런 예측불가능은 주로 부정적인 사건들과 결합하고, 자신의 통제력이 발휘될 가능성이 적어질 때 사람들은 무력감과 우울을 경험한다. 이처럼 자신에 대한 효능감이 극도로 약화되는 병적 우울이 자살을 일으킨다는 것이 통설이다. 통제력의 상실에 대한 마지막의 통제가 바로 자신의 생명에 대한 통제로 이어진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안한 존재인 것인지 모른다. 공포를 야기하는 대상들과 맞서면서 사람들은 불안해 하며, 이런 불안은 인간들에게 공포의 대상을 피하든지, 맞서 싸우도록 만듦으로써 인간의 생존을 돕는 기제로 작동한다. 만일 인간에게 불안이 없었다면, 아마 예전에 멸종되었을 것이다. 또한, 불안은 인간의 존재론적 불확실성(existential uncertainty)에서도 기인한다. 이 말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운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 지, 어떻게 자신과 주변을 해석해야 할 지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인간은 불확정적인 미래에 대해 불안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라자러스(Lazarus)는 두 가지 방식의 스트레스에 대한 대처방안을 밝힌 바 있다. 그의 대처방식은 ‘정서중심대처’와 ‘문제중심대처’로 나눌 수 있는데, 정서중심대처란 그 스트레스에 대한 해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리는 대처법이고, 문제중심대처는 그 스트레스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스트레스에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의 대처와 유사한 방식으로 불안은 두 가지 양태의 인간의 행위를 형성시켰다. 그 하나는 불안한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신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안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다. IMF라는 경제위기를 중심에 두고 우리 사회를 바라본다면, 그러한 상황은 사람들에게 불안을 야기했고, 불안은 예외없이 현대의 사람들에게도 두 가지 양태의 행위를 형성시켰다. ‘박정희 신드롬‘과 ‘소액주주 모으기 운동’ 등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박정희 신드롬, 신화의 뒷모습

‘박정희 신드롬‘은 현재의 상황에 따라 대중이 요구하고 이에 부응해 특정 세력이 만들어낸 신화라 할 수 있다. 신화는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며, 현재의 사태를 해석할 수 있는 준거로 작용한다.

즉 ‘시간’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사람들에게 모호함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신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불안한 사람들이 요구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기능을 드러낼 가능성이 많다. ‘박정희 신드롬’의 경우, 미래를 대처하는 방식을 제시하기보다 “지금보다 옛날이 낳다”는 식의 수구적·보수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한 것을 들 수 있다. 정치적 맥락의 함의는 차치하더라도, 적극성의 소진을 야기한다는 면에서 파악해도 과히 긍정적 현상은 아닌 것이다.

또한 적극성을 이끌어 낸다고 하더라도 ‘파시즘’에로 경사할 가능성이 많아진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피폐된 독일의 상황을 바탕으로 히틀러가 등장했던 것이 대표적 예로 꼽힌다. 그런 면에서 최근 KBS·한겨레가 공동조사한 설문 결과 ‘인위적인 정계 개편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70%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정 계파의 줄서기를 통한 이합집산이 어떤 희망을 제시하리란 판단보다는, 강한 지도력에의 희구가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최근 언론이 보여주는 ‘김대중 찬양’이 겹쳐진다면, 과정을 무시한 채 결과만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는 군부 정권 때의 악습이 고개를 쳐들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하나, 불안에 대한 대처 방식은 불안의 원천을 제거할 수 있는 조직과 집단을 만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참여연대’의 ‘소액주주 모으기 운동’은 직접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측면에서 적극적이다. 이런 적극적인 활동의 수행과 성공의 경험은 자기가치감과 자기효능감을 높이며, 더 높은 불안에 대해서도 대처할 능력을 길러준다.

자살의 심리학, 불안의 심리학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논의될 성격을 띠고 있다. IMF라는 외부적 상황이 두드러지게 강제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를 뛰어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맹목적인 집단주의나 강력한 지도력의 희구라기보다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뿌리 깊은 성찰이 아닐까. 인간은 그동안 불안을 감소시키려는 어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안을 감소시키지는 못했다. 성찰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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