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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5.5 화 23:34
기획사회
109호 [시사포커스] ‘어린이기’의 붕괴와 가족공동체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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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호]
승인 2006.02.26  18:4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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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호 [시사포커스] ‘어린이기’의 붕괴와 가족공동체의 해체
2003-04-04 13:41 | VIEW : 28
 
109호 [시사포커스] ‘어린이기’의 붕괴와 가족공동체의 해체
원생의 교내 학술지 참여 기회 증진할 터

호한용 / 편집위원


요즈음 ‘어린이’가 수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어린이의 사회적 안전벨트’가 무력화되고 있다. 물론 ‘어린이’가 사회적으로 약한고리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의 세태는 ‘어린이는 연약해서 더러운 세상에 오염되기 쉽다’는 상식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어린이기’(childhood)의 붕괴와 가족공동체의 해체라고 할까. 더이상 우리는 어린이를 순진무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가족공동체를 어린이를 보호하는 최선의 안전장치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어린이들은 희망은 커녕 ‘경제적 비관’으로 집단동반자살을 도모하는가 하면 유아들은 돈에 눈이먼 장사꾼에 의해 거래되기 일쑤이다.

또한 계모가 자식을 학대하다 못해 살해하여 매장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더구나 그 계모가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혹자는 과도한 해석이라고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하나의 ‘한계상황’을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린이는 나라의 기둥’이라는 식의 논리는 20세기 한국사회의 산물이다. 조선조 시대만 해도 어린아이는 사회적 지위가 극히 보잘 것 없었다. 양반집 자제들과 여염집 아이들 모두 독자적인 지위가 보장되지 않았다.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고사성어가 함축하고 있듯이 근대 이전의 어린아이는 어른의 축소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어린이’의 독자적인 지위가 보장되었다. ‘어린이’는 무절제(immodesty)한 것이 아니라 순진무구(innocence)한 존재로 여겨졌다. ‘순진무구함’이라는 ‘어린이기’의 가치가 등장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린이기’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고, 증오를 모르는 시기이며, 인간 생의 황금기로 인식되었다. 어린이는 곧 천사에 비유되었다.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나 어린이는 사회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어린이는 사회의 얼굴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인식의 지평은 근대적 형태의 가족의 등장에 의해 보장되었다. ‘핵가족’ 형식의 근대적 가족모델은 각각의 기능이 전문기관으로 이전(대표적인 사례가 학교로 이전된 교육기능이다)되면서 그 권한과 영역이 축소되었다. 반면 정서적인 기능은 강화되었다. ‘가족을 위해 살아간다’ 혹은 ‘가족밖에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강화된 정서적 기능의 면모이다. 어떻게 보면 이와같은 ‘가족주의’는 사회적 욕망을 코드화하는 장치인 셈이다. 마지못해 가족을 위해 살아가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모습에서 ‘가족을 위한 통캄가 자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한계상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즘 아이들은 조숙해서 더 이상 ‘순진무구함’이 ‘어린이기’로 등치될 수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가족은 더 이상 ‘어린이기’를 보호하는 사회적 안전장치일 수 없다는 것인가. 최근 <피노키오>라는 영화를 보면 어린이가 악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어린이는 결코 범죄자일 수 없다’는 헐리우드의 규율에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또한 가족은 잔잔한 평화로움의 상징이기 보다는 갈등의 온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가족은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기존의 관념이 이렇게 전도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와같은 현상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어린이기’의 발견이 지니는 이중적 면모의 모순을 배태하고 있다. 한편으로 ‘어린이기’의 가치가 숭고하다고 지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숭고한 인성을 계발하기 위해서 ‘엄격한 규율’을 부과해야 한다는 역설. 이러한 역설에 의하면, 실제로 풍부한 개성은 ‘엄격한 상품화의 규율’에 의해 부과될 뿐이다. 그리고 ‘어린이기’는 선악을 넘어서 백지장과 같은 단순한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셈이다. 현재 우리는 이 역설의 극한을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탈주할지도 모를 기차처럼.

요즈음 ‘어린이’가 수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어린이의 사회적 안전벨트’가 무력화되고 있다. 물론 ‘어린이’가 사회적으로 약한고리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의 세태는 ‘어린이는 연약해서 더러운 세상에 오염되기 쉽다’는 상식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어린이기’(childhood)의 붕괴와 가족공동체의 해체라고 할까. 더이상 우리는 어린이를 순진무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가족공동체를 어린이를 보호하는 최선의 안전장치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어린이들은 희망은 커녕 ‘경제적 비관’으로 집단동반자살을 도모하는가 하면 유아들은 돈에 눈이먼 장사꾼에 의해 거래되기 일쑤이다.

또한 계모가 자식을 학대하다 못해 살해하여 매장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더구나 그 계모가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혹자는 과도한 해석이라고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하나의 ‘한계상황’을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린이는 나라의 기둥’이라는 식의 논리는 20세기 한국사회의 산물이다. 조선조 시대만 해도 어린아이는 사회적 지위가 극히 보잘 것 없었다. 양반집 자제들과 여염집 아이들 모두 독자적인 지위가 보장되지 않았다.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고사성어가 함축하고 있듯이 근대 이전의 어린아이는 어른의 축소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어린이’의 독자적인 지위가 보장되었다. ‘어린이’는 무절제(immodesty)한 것이 아니라 순진무구(innocence)한 존재로 여겨졌다. ‘순진무구함’이라는 ‘어린이기’의 가치가 등장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린이기’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고, 증오를 모르는 시기이며, 인간 생의 황금기로 인식되었다. 어린이는 곧 천사에 비유되었다.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나 어린이는 사회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어린이는 사회의 얼굴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인식의 지평은 근대적 형태의 가족의 등장에 의해 보장되었다. ‘핵가족’ 형식의 근대적 가족모델은 각각의 기능이 전문기관으로 이전(대표적인 사례가 학교로 이전된 교육기능이다)되면서 그 권한과 영역이 축소되었다. 반면 정서적인 기능은 강화되었다. ‘가족을 위해 살아간다’ 혹은 ‘가족밖에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강화된 정서적 기능의 면모이다. 어떻게 보면 이와같은 ‘가족주의’는 사회적 욕망을 코드화하는 장치인 셈이다. 마지못해 가족을 위해 살아가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모습에서 ‘가족을 위한 통캄가 자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한계상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즘 아이들은 조숙해서 더 이상 ‘순진무구함’이 ‘어린이기’로 등치될 수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가족은 더 이상 ‘어린이기’를 보호하는 사회적 안전장치일 수 없다는 것인가. 최근 <피노키오>라는 영화를 보면 어린이가 악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어린이는 결코 범죄자일 수 없다’는 헐리우드의 규율에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또한 가족은 잔잔한 평화로움의 상징이기 보다는 갈등의 온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가족은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기존의 관념이 이렇게 전도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와같은 현상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어린이기’의 발견이 지니는 이중적 면모의 모순을 배태하고 있다. 한편으로 ‘어린이기’의 가치가 숭고하다고 지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숭고한 인성을 계발하기 위해서 ‘엄격한 규율’을 부과해야 한다는 역설. 이러한 역설에 의하면, 실제로 풍부한 개성은 ‘엄격한 상품화의 규율’에 의해 부과될 뿐이다. 그리고 ‘어린이기’는 선악을 넘어서 백지장과 같은 단순한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셈이다. 현재 우리는 이 역설의 극한을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탈주할지도 모를 기차처럼.

요즈음 ‘어린이’가 수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어린이의 사회적 안전벨트’가 무력화되고 있다. 물론 ‘어린이’가 사회적으로 약한고리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의 세태는 ‘어린이는 연약해서 더러운 세상에 오염되기 쉽다’는 상식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어린이기’(childhood)의 붕괴와 가족공동체의 해체라고 할까. 더이상 우리는 어린이를 순진무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가족공동체를 어린이를 보호하는 최선의 안전장치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어린이들은 희망은 커녕 ‘경제적 비관’으로 집단동반자살을 도모하는가 하면 유아들은 돈에 눈이먼 장사꾼에 의해 거래되기 일쑤이다.

또한 계모가 자식을 학대하다 못해 살해하여 매장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더구나 그 계모가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혹자는 과도한 해석이라고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하나의 ‘한계상황’을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린이는 나라의 기둥’이라는 식의 논리는 20세기 한국사회의 산물이다. 조선조 시대만 해도 어린아이는 사회적 지위가 극히 보잘 것 없었다. 양반집 자제들과 여염집 아이들 모두 독자적인 지위가 보장되지 않았다.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고사성어가 함축하고 있듯이 근대 이전의 어린아이는 어른의 축소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어린이’의 독자적인 지위가 보장되었다. ‘어린이’는 무절제(immodesty)한 것이 아니라 순진무구(innocence)한 존재로 여겨졌다. ‘순진무구함’이라는 ‘어린이기’의 가치가 등장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린이기’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고, 증오를 모르는 시기이며, 인간 생의 황금기로 인식되었다. 어린이는 곧 천사에 비유되었다.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나 어린이는 사회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어린이는 사회의 얼굴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인식의 지평은 근대적 형태의 가족의 등장에 의해 보장되었다. ‘핵가족’ 형식의 근대적 가족모델은 각각의 기능이 전문기관으로 이전(대표적인 사례가 학교로 이전된 교육기능이다)되면서 그 권한과 영역이 축소되었다. 반면 정서적인 기능은 강화되었다. ‘가족을 위해 살아간다’ 혹은 ‘가족밖에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강화된 정서적 기능의 면모이다. 어떻게 보면 이와같은 ‘가족주의’는 사회적 욕망을 코드화하는 장치인 셈이다. 마지못해 가족을 위해 살아가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모습에서 ‘가족을 위한 통캄가 자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한계상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즘 아이들은 조숙해서 더 이상 ‘순진무구함’이 ‘어린이기’로 등치될 수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가족은 더 이상 ‘어린이기’를 보호하는 사회적 안전장치일 수 없다는 것인가. 최근 <피노키오>라는 영화를 보면 어린이가 악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어린이는 결코 범죄자일 수 없다’는 헐리우드의 규율에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또한 가족은 잔잔한 평화로움의 상징이기 보다는 갈등의 온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가족은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기존의 관념이 이렇게 전도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와같은 현상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어린이기’의 발견이 지니는 이중적 면모의 모순을 배태하고 있다. 한편으로 ‘어린이기’의 가치가 숭고하다고 지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숭고한 인성을 계발하기 위해서 ‘엄격한 규율’을 부과해야 한다는 역설. 이러한 역설에 의하면, 실제로 풍부한 개성은 ‘엄격한 상품화의 규율’에 의해 부과될 뿐이다. 그리고 ‘어린이기’는 선악을 넘어서 백지장과 같은 단순한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셈이다. 현재 우리는 이 역설의 극한을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탈주할지도 모를 기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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