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호 [사회비평] 공동육아운동
2003-04-04 13:52 | VIEW : 34
 
109호 [사회비평] 공동육아운동
공동체적 교육현장, 이제 길들이기에서 세상 바꾸기로

이부미 / 유아교육학 박사 6차


‘교육이란 무엇인갗라는 물음에 대해 ‘사람이 자기 새끼를 사람답게 기르는 일’이라고 답한다면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원초적 표현일까? 어쩌면 표현이 단순한 만큼 그 의미의 포용력은 클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사람답게’의 기준은 시공간에 따라 변화되어 왔고 그 변화의 복잡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복잡함의 속내를 꼼꼼이 살펴보면, 거기에는 시대적 요구에 따른 교육의 ‘허위의식’이 상당히 개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허위의식을 빼고 남은 ‘사람답게’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듯하다. 소위 발전과 문명화를 보장해주는 산업화의 생산방식은 교육에도 영향을 미쳐서 사람-삶-교육은 상호간 소외현상을 낳고 있고 그 속에서 우리가 아주 오래 전부터 소망해 오던 인간교육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됨의 근본을 살리는 교육을 한다는 것은 결코 녹녹치 않은 미완의 작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교육은 세상을 바꿀 능력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생성된 사회구조나 체제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것이 교육의 능력인가? 이 두 가지 모두 교육의 내재적 속성이라고 쉽게 말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교육에 대한 이미지는 후자가 훨씬 강하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산업화를 안정된 토대 위에서 발전시킨 서구사회에서는 체제순응적인 교육이 잉태하는 문제를 자체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일정 한도 내에서 길러왔다. 뿐만 아니라 산업화에 따른 인간성의 피폐화를 염려하여,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차원에서의 교육적 실천이 이미 전후 산업화가 재건되던 때 부터 있어 왔다.

탈주적 힘으로써의 교육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심심찮게 대안교육이란 말을 들을 수 있다. 참교육, 열린 교육 등도 이러한 대안교육의 맥락에서 그 의미를 새겨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의미가 작게나마 실천되어 보편적 인식으로 사회구성원들에게 공유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들어서의 일이다. 다시말해 우리는 지금 그 어느때 보다도 ‘교육의 역동성’을 새롭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젊은 부모들이 협동조합을 구성하여 건강한 공동육아문화를 만들자는 노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과 교육의 역동성을 연결해서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그래서 공동육아운동의 성공여부는 곧 이 둘의 관계성을 사회적으로 검증해 보는 기회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공동육아운동은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으로서 삶을 시작하는 아이들과 가족이라는 사회적 단위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젊은 부모들이 그 출발점에서부터 공동체적인 삶의 방식을 경험하고 내면화하여 장기적이고 점진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사회적 성장과 함께 본질적인 사회문화 변화를 이끌어 내기를 바라는 운동이다.

인간의 전체 생애주기를 통해 볼 때, 육아의 시기야말로 어른들에게나 아이들에게나 일상생활을 통해 삶의 방식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재구성해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결정적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공동육아라는 장은 열린관계를 지향하는 상호작용을 통해 아이들이 기존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의 틀을 형성함으로써 기존세계에 ‘능동적 적응’을 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수정 확대함으로써 새로운 의미와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총체적 삶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이와같은 공동육아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부모들이 협동조합을 구성해서 교육 터전을 구입하고 (전세) 교사도 채용해서 아이들을 교육한 지 만 3년을 넘기고 있다. 그동안 공동육아의 가치는 예상외로 빠르게 확산되어 전국에 15개 정도의 터전(어린이집)이 운영되고 있다. 공동육아는 부모, 어린이, 교사들이 공동 주체가 되는 3각체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주로 부모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공동육아에 참여하고 있는 어른, 특히 부모들은 주로 30대에서 40대 초반으로 그들의 20대를 80년대 상황속에서 보낸 사람들이다. 80년대 상황에서 20대의 젊음을 보낸 사람들은 정치적 억압체제에 대해 직접적인 저항 행동을 했는가의 여부를 떠나 정서적 저항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거칠기는 하나 용기있는 저항도 해보았고 그에 따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가정을 구성한 세대이다. 즉, 특별한 사회정치적 경험을 한 30대와 90년대가 요구하는 삶의 패턴이 만나는 지점이 곧 공동육아 출발점의 한 부분을 이루었던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들이 이제는 아이를 통해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고 ‘내 아이’가 아닌 ‘우리 아이’들의 인간다운 성장을 위해 작지만 정교한 실천을 자신들의 구체적 삶 속에서 해내고 있다.

부모됨, 공동육아문화 정착의 실마리

그러나 이러한 공유된 이상과 가치를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데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가 민주적인 의사소통과 합리적인 의사결정의 서투름이다. 따라서 건강한 관계망 형성이 그들이 풀어가야 할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예전에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했으며 지금은 한 어린이집의 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는 공동육아 참여자(父)의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가 뜻을 같이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이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왜 우리는 서로의 생각이 다른 부분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득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정서적으로 생채기를 서로에게 내고야 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의 발달을 수행해 오면서 근대성의 가장 큰 선물인 ‘책임감 있는 합리성’을 교육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체제 순응적 교육에 대한 불신으로 공동육아운동이 부각되고 있음에도 불과하고 제한된 교육적 경험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힘겨워하고 있다.

비교적 평범하게 20대를 보낸 한 어린이의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하였다. “공동육아를 몰랐을 때가 편하고 좋았어요. 그때는 그냥 아이가 하나 있었던 겁니다. 여기를 알고나서 내적 고통이 더 심해졌어요. 그러나 이 일이 가치로운 것임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포기를 못하고 더 괴로운 것 같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아이 때문에 세상을 이렇게 사는 사람은 나 혼자인 것 같아요. 월차나 출퇴근 시간을 공동육아 터전의 상황에 맞게 조정하고 그외에도 시간과 정성을 들여 이 일에 참여한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허용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공동육아에 참여하는 부모는 서투른 의사소통 능력으로 인한 내적 갈등과 사회적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신념을 하루 하루의 삶 속에서 어렵사리 풀어나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학습하게 되는 교육적 경험은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이제 2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자기를 지키려는 단호함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부모됨을 통해, 공동육아라는 공유된 가치를 구현하는 공동체의 삶의 양식을 스스로 배워서 내면화시키는 진정한 교육적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들의 힘과 영향력은 아직 미약하다. 그렇지만 이와같은 의미있는 소수의 실험들이 20대의 다음 부모세대들에게 탄탄히 뻗어나갈 때, 교육은 세상을 바꾸는 한 가지 방식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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