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호 [시사포커스] 노숙자,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03-04-04 13:53 | VIEW : 40
 
110호 [시사포커스] 노숙자,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당장 먹고 살 곳이 필요해요”

호한용 / 편집위원


“내가 그래도 사장이었는데…. 정정당당하게 벌어 쓰고 싶고 남에게 구걸하고 싶은 생각은 한치도 없다. … 처음에는 이상해. 무료급식을 타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고 하지만 이것저것 가릴 처지도 아니고…. 바라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일자리 갖고 평탄하게 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서울역 인근에서 근근히 생활하고 있는 어느 노숙자의 말이다. 앞의 자신감 섞인 말이 ‘어제’의 모습이라면 뒤의 절망감 섞인 말은 ‘오늘’의 말이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두렵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분노감 섞인 ‘미러의 말이다. “나는 뭔가 강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사회에 대한 분노감마저 품고 있다.” 요즈음 하루 1만명꼴로 늘고 있는 실업자와 함께 노숙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실태조사에 의하면, 서울의 노숙자 숫자는 약 8백40여명(2월20일경)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은 지난해 보다 무려 60% 늘어난 수치다. 하지만 지금은 적게는 1천명, 많게는 2천명에 이른다고 추정되고 있다. 불과 몇 달 만에 엄청나게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더욱 시급한 것은 양적인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새 노숙자의 대부분이 실직한 남성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실직에 대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에서 홈리스(Homeless;노숙자)일 뿐만아니라 호프리스(Hopeless)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숙자는 ‘집없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약간씩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비록 임시적이더라도 자신만의 사적 공간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정의가 가장 보편적이다. 이들은 주로 거리, 역전, 공원 등지를 터전삼아 종교단체의 무료급식의 도움으로 근근히 생활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돈 조금 받고 하루종일 공사판에서 땀을 흘리느니 차라리 맘편히 빌어먹는 것이 낫다”는 식으로 타성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 문제는 3D업종을 기피하는 개인의 안량한 자존심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노숙자=게으르고 능력없는 인간’으로 규정하는 기존의 보수적인 시각은 이러한 궤도에 있는 해석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상식적으로도 ‘원래 그런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원러가 지닌 원죄는 사회의 책임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수많은 구호활동과 사회보장은 사회의 책임을 인정하는 심리적 보상물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사회보장의 출생지는 단순한 안타까움이라든가 위험대상에 대한 공포감인 듯하다. ‘노숙자=게으르고 능력없는 인간=불쌍한 인간 혹은 위험한 인간’으로의 궤도 확장.

노숙자 문제가 현재 논의되고 있는 수준은 적극적인 사회보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직업보장, 주택제공, 무상의료 제공 등에 맞추어져 있는 구제책은 노숙자의 최저생활수준 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소극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물론 우리 사회는 이러한 최소한의 사회보장마저 부족하다는 점에서 쉽게 간과할 문제는 아니다. 노숙자 구제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서구사회와는 사뭇 다르지 않은가.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노숙자는 불쌍한 인간 혹은 위험한 인간이 아니라 자기반성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사회보장이 단순히 시혜적인 측면을 갖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목자가 양떼를 보살피는 것과 같이 개개인 삶의 배려를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개인은 타성화될 수도 있지만 자기에의 배려 속에서 ‘무미건조한’ 삶을 넘어설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단지 분노감에 의해 도끼를 든 야만인의 혁명을 넘어설 수 있는 ‘진정한’ 자기혁명에의 길이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에서 소외된 능력을 배우지만, 그들은 거리에서 자기를 깨닫는다. ‘나 자신을 알라’. 노숙자, 과연, 부랑으로 가는 길인가 혁명으로 가는 길인가.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우리네 실정은 여전히 분노감과 절망감의 미래만을 예고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