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호 [사회쟁점] 군비축소와 평화인권운동
2003-04-04 13:59 | VIEW : 31
 
119호 [사회쟁점] 군비축소와 평화인권운동
군축운동과 통일운동의 변증법, 한국의 평화운동이 가야할 길

손상열 / 평화인권연대 대표  


냉전기는 이데올로기적 결속을 기초로 경제성장을 추구하던 시대였다. 자본주의권은 미국을 맹주로, 사회주의권은 소련을 맹주로 하여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교환관계를 유지해 왔었다. 그리고 군사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각 진영에 속한 국가들은 미국과 소련을 군사적 방패막으로 삼는 한편, 미국과 소련은 자기진영에 속한 국가들의 군사력을 통제함으로써 세계체제 차원에서 군사적 안정을 도모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 탈냉전은 이러한 세계체제 차원의 이중적 상호의존질서를 붕괴시키기에 이른다.

탈냉전기 세계군사질서의 불안정성
우선, 구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제 3세계는 다음과 같은 선택, 즉 미국의 군사적 패권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군사력의 팽창’을 통해 자국의 안보를 강화할 것인가라는 문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리고 선택의 결과는 인도-파키스탄의 핵실험, 북한의 로켓발사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제 3세계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력 강화의 도미노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같은 제 3세계의 군사화는 탈냉전기 미국의 군사전략 상의 변화를 하나의 촉매제로 하여 진행되고 있다는 점 또한 확인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실 미국의 입장에서 탈냉전이란 거대한 적 소련이 사라지는 상황을 의미했으며, 이는 미국이 대규모 군전력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명분의 상실을 의미했다.

따라서, 미국은 이미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팽창된 군산초국적 기업을 유지시키기 위한 새로운 명분이 필요했고, 이는 핵, 화학, 미사일개발능력을 가진 것으로 추측되는 지역군사강국(이라크, 북한 등)을 ‘탈냉전기의 새로운 적들’로 규정함으로써 가능해지게 된다. 이에 따라 미국은 TMD(Theater Missile Defence)를 기초로 완벽한 미사일 방어체계의 구축을 시도하는 한편, 대량살상무기의 확산방지라는 명목으로 제 3세계의 군사강국화에 일정한 제재를 가하면서 군사적 패권을 연장해가려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논리는 “미국만의 군사력증강이 세계평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식의 논리로서, 결국 제 3세계의 반발과 세계체제 차원에서의 악순환적 군비경쟁을 자극하고 있을 뿐이다.

세계체제 차원에서 심화되는 군사질서의 불안정성은 동아시아에도 마찬가지 양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미국 군사전략의 변화에 따라 과거에는 단지 봉쇄의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북한이 이제는 지역분쟁을 조장하는 주적으로 설정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미-일 군사동맹의 강화가 뚜렷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미-일 군사동맹의 강화는 이른바 ‘보통국가화’를 지향하며 끊임없이 군사대국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일본의 이해와 동아시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미국의 이해가 결합된 것으로 동아시아 지역의 군사적 갈등과 군비증강을 촉진하는 매우 강력한 요소로 부상하고 있는 중이다.

한편 이미 오래전에 완전한 자주국방체제를 확립한 중국은 80년대 이후 급성장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패권주의적 면모를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원양함대의 강화와 최근의 영토분쟁은 이른바 ‘신중화주의’에 대한 국제적 의구심을 더하는 것으로, 이러한 중국의 모습은 미·일 군사동맹의 강화와 짝을 이루면서 동아시아 군비증강에 상승효과를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탈냉전의 상황에서 강력한 군사적·경제적 지원자를 잃은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능력의 함양을 통해 동아시아에서의 위치제고 및 체제유지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 또한 군사적·불안정성을 심화시키는 중대한 요인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동안 한국에서 진행된 평화운동은 통일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된 성격이 강하다. 물론 이는 남북한의 군사력 증강이 분단을 매개로 하여 진행되어 왔다는 점 때문이며, 그런 이유로 앞으로도 한국에서의 평화운동은 통일운동과 많은 접점을 가져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평화운동에 대한 통일운동의 과잉결정은 평화운동의 온전한 형성과정을 지체시킨 것 또한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그 동안 군축과 관련해 제기된 주장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것으로 하자.

이제까지 군축운동은 한반도에서 통일을 촉진시킬 하나의 방도로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의 연장에서 군축과정은 통일과정과 동일시되었다. 즉, 남북한 군축이 도달해야 하는 목표는 ‘통일조국’의 안전을 수호할 효율적이고 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으로 맞추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제시되는 군축방안은 과도한 병력을 남북을 통틀어 감축하고, 이를 통해 발생하는 경제적 잉여를 사회복지와 무기체계첨단화를 통한 군현대화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한국의 평화운동에 대한 몇가지 제언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평화운동의 입장에서 보자면, 몇가지 문제를 가질 수밖에 없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평화운동의 지향과 관련한 것이다. 평화운동은 본래적으로 탈군사화, 즉 군사부문의 폐절을 무조건적으로 지향하는 운동이다. 왜냐하면, 핵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사회의 군사력은 인류절멸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근본적으로 反생태적인 것이며, 군사부문이 존재하는 한 인류의 평화와 인권은 언제든지 교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무기첨단화를 통한 군현대화라는 대안이 평화군축운동의 대안으로 제시된다면, 이것은 평화운동의 본래적 지향과 근본적으로는 배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의 군축운동이 군사력 중심의 안보관을 국가부문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군축운동의 대안논리가 무기첨단화를 통한 군현대화로 결론짓는 것은 “일정한 군사력의 확보만이 안보를 해결할 수 있다”는 현실주의적 정치관에 의지하는 한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운동은 당면한 중요한 과제로 군사력 중심의 안보관에서 탈피해, 탈군사적 안보패러다임과 관련한 논의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일국적·민족적 경계를 넘어선 국제주의적 시각이 평화운동의 근본적 시선으로서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미 현대사회의 군사화과정은 세계적, 지역적 연관 속에서 형성되고 있다. 이는 평화운동의 구성 또한 세계적, 지역적 연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서의 평화운동은 동아시아의 군사화와 관련한 국제적 쟁점을 매개로 동아시아 평화세력들간의 연대를 기본적으로 전제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활성화되지 않는 상태에서, 아무리 한반도의 군축이 통일을 통해 달성된다 할지라도 동아시아의 군사적 불안정성은 여전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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